(17강) 삼상 6:1-9 불신앙과 신앙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필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철저하게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누구든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옷의 단추를 꿸 때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되어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고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 수도 없고, 또한 그 길을 갈 수도 없는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인들은 인간의 이러한 면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구별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신앙하느냐에 그 초점을 둘 뿐이지 과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계시하시는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이 있다 없다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이상 저는 여러분께 단호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디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서 세상을 보시고 여러분 자신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랜 세월을 교회를 다니며 배우고 행해왔던 신앙이기 때문에 무조건 ‘내것이 옳다’라는 생각을 버리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겸손하게 들으시면서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별하려는 자세를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악한 것이고 해로운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면 버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러한 말씀을 또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이방인의 형태들이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하는 무리들에게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며 자화자찬하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지금껏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그러한 신앙의 길을 살아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고 만들어낸 우리들의 신앙의 길을 헛되이 살아온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재앙이 내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재앙의 원인이 언약궤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약궤가 보내진 곳마다 독종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의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내려진 것인지에 대해 아직 의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보내는 방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언약궤를 보내지 않고 계속 자기들이 갖고 있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하는데 그 날이 주일입니다. 그때는 그냥 한 주 정도야 빠져도 되겠지 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에 사고가 나서 발을 다쳤습니다. 그럴 때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주일에 빠져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우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또 약속이 생겨서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사고가 나서 이번에는 손을 다치게 됩니다. 그러자 점점 주일에 빠져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것도 역시 우연일 수 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도 주일에 한번 빠져 보자. 이때도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 분명하고, 아무 일도 없으면 지금까지 사고는 다 우연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죄가 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했는데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인간의 양심은 혹시 벌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벌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주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힘들고 두려운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앞으로는 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보는 우연히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이 벌준 것으로 오해함으로 인해서 하고 싶은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벌준 것이 확실하다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드린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혹시 ‘그래 주일 안 지키면 하나님이 벌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죠? 여러분은 그러한 수준에서 벗어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일 안 지킨다고 벌주는 분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성도가 함께 모이기로 약속한 날을 소홀히 생각하는 수준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냐 아니면 우연이냐?’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끝까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기를 원하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이며,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이 이러한 모습을 대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주일에 여행을 가서 사고가 난 것이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든 우연이냐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사고를 통해서 혹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한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앙함에 있어서 바로 이점이 잘못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고자 힘쓸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은 것이냐? 아니면 우연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우연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는 것이 심히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3-5절을 보면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일단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냥 돌려보내면 안되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론 속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법입니다. 이것을 보면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그대로 흉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속건제에 바치고자 한 제물은 금독종과 금쥐였습니다. 금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발생한 독종의 환부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금쥐를 만든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블레셋 사람들이 받은 재앙에 쥐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생각은 받은 재앙의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신에게 바치면 그 재앙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속건제의 제물에는 금독종이나 금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제사방법에 대해서는 자기들 생각대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는 목적은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서 재앙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블레셋을 통해서 신앙과 불신앙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하나님말고 다른 신, 즉 다곤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분명한 구분은 하나님을 향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향하느냐로 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속건제를 드리는 목적은 신의 진노를 달래고 병이 낫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이러한 블레셋과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벌을 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주일을 지킨다고 하거나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블레셋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란 신을 달래서 자기들에게 진노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가가 관심거리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했었다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속건제를 드리면서 제물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듭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에게 나아가고 신을 달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달래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방식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종교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될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블레셋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속건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속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제물의 피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것이나 가지고 나오면 안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제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자신들의 죄를 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재앙을 피하고 병이 낫기 위한 목적으로 제사라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 용서함을 받았음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제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블레셋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병이 낫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처럼 금독종과 금쥐를 바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안 지켜서 벌받았다고 생각되면 주일을 잘 지켜서 벌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십일조를 안해서 벌받았다고 생각되면 십일조를 함으로써 벌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블레셋과 같은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제사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방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곤을 섬기는 상식에서 이해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낱낱이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개인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답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며, 무엇에 대해 진노하시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에 대해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배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의 손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대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다만 자기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블레셋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사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제물의 피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생각한 것을 바침으로써 죄값을 치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상한 심령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나가는 것이 진정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뭔가를 바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므로 진노를 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불신앙일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벌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는 다 버리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아직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하면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백성을 백성답게 만들이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면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나를 쳐서라도 진리의 길로 이끌어 달라고 원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만이 생명임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뭔가를 바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으로 용서되었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생각하는 이것이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며 이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무엇이며 신앙은 또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하시고 혹 우리들이 블레셋과 같은 불신앙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