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삼상 6:10-21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은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는 하지만 무엇이 신앙인가에 대해서는 신앙해야 하는 인간쪽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정하시고 요구하시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이 신앙한다고 하는 모든 것이 가자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블레셋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이것을 바치면 하나님이라는 신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언약궤를 보내면서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과연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를 확인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불신앙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결국 우리는 불신앙을 신앙으로 착각한 채 잘못된 길에 있었음을 깨닫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설교 제목대로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중심으로 일하시고 무엇을 지키시고자 하시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에 거하는 자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고 말합니다. 13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벧세메스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대로 레위인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하였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법궤를 들어다 봤다는 이유만으로 오만 칠십 인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19절에서는 크게 살육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분명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크게 잘못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약궤 한번 들여다봤다고 해서 오만 칠십 명의 사람을 살육하는 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성경에는 오만이라는 글이 괄호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본에는 오만이라는 글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칠십 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칠십 명이라는 수가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들여다 본 사람이 오만 칠십 명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만 칠십이라는 수가 법궤를 구경하려면 오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를 본 사람은 몇 명이었는데 그 벌이 벧세메스 전체에 내려졌다는 추측도 해볼 수가 있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입니다.

또 사본을 기록한 사람이 오만 칠십 명이라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오만 칠십 명을 죽였겠는가?’라는 생각에 오만이라는 글을 뺏을 가능성도 있다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 역시 추측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 오만 칠십 명을 죽인 것보다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하나님의 벌이 뭔가 가볍게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오만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을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벌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수에 따라 그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신 사람의 수가 칠십 명이든 오만 칠십 명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그토록 진노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다만 언약궤를 들여다봤을 뿐입니다. 일반 사람이 마음대로 대할 수 없는 언약궤이기 때문에 호기심에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블레셋에 빼앗긴 법궤가 무사한지 염려스러워서 들여다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상관없이 법궤를 들여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살륙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그토록 진노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앎으로써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생각해 볼 말씀인 것입니다.

민 4:20절에 보면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성소를 보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피를 바름으로써 정결하게 한 후에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를 보지 말하는 것은 언약궤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말씀을 어겼다고 해서 죽음을 당했을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엇 때문에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말라는 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언약궤를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용서되는 현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언약궤 앞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던 제물을 보면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자라면 언약궤를 한낱 호기심이나 구경거리로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언약궤 앞에 엎드리어 자신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하고 제물의 흘린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 때문에 죽어간 제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언약궤는 다만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구경거리가 될 뿐이지 그 앞에 무릎 꿇을 대상으로는 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오만 칠십 명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후에야 자신들의 불의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궤 앞에 설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신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인간의 겸손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거룩은 언약궤입니다. 죄가 용서되고 깨끗함만 남게 되는 언약궤에 하나님의 거룩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난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벧세메스 사람들의 고백대로 하자면, ‘거룩하신 십자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르게 대하는 신자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약궤를 대하고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자기가 곧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는 정신상태가 언약궤를 단지 구경거리로 여기고 들여다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을 오만 칠십 명이나 죽이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그토록 진노하시고 미워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벧세메스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이미 죄없다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생각하라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로서 스스로 죄를 씻어 나갑니다. 신앙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미움과 진노 아래 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착한 행위를 산더미처럼 쌓았다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이 흘린 피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만 들려집니까? 세상에서 돈벌고 자식 키우는 일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말하되 그냥 들여다보는 구경거리로 여기는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는 나무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단지 상자를 봤다는 이유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멸시했던 것입니다. 언약궤가 가르치는 진리를 무시함으로써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은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겠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고 그 죄가 제물의 피로써 용서되는 현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언약궤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불의한 자임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깨끗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신자다운 것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잘난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하는 것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보면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망에 처한 자로 죽어야 할 운명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가졌다 못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로 사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다가 죽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은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높은 지위는 여러분에게 권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풀의 꽃처럼, 안개처럼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영원토록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자신을 생각해 본다면 세상 것은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자리에 서지를 않습니다. 마치 마지막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어리석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만이 십자가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어야 할 죄인임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성경에서만 말하고 있는 가상적인 세계로만 인식을 합니다. 그러니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따라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도 죄인된 자가 구출 받게 된 은혜를 고백하는 것보다는 자기 이익과 자기 중심의 삶에 대한 문제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키십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멸시받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높이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