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29:17절에 보면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은 말로 하면 안듣고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과연 성경에 왜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런 구절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우리 자신을 종의 자리에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말로는 안듣는, 알고도 청종치 않는 그런 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종에게는 개인 재산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은 제것이 되지 못하고 모두가 주인의 소유일 뿐입니다. 결국 종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도 않는 일에 힘쓰고자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악한 종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주인의 종은 어떤 자입니까? 그는 바로 자기 유익을 보지 않고 오직 주인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을 위하여 존재함을 자각하고 주인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가 바로 진정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한다면 우리에게는 분명 그러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종으로 살아갈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곧 악한 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유익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착한 종이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요즘 신자들은 교회에서 사랑하라느니,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느니라고 말하면 늘 하는 말로 여기고 흘러 들으면서도, T.V에 어느 의학박사가 나와서 사랑을 베풀고,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면 몸에 엔돌핀 같은 물질이 생겨서 건강에 좋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말은 감동적으로 들으면서 ‘앞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야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진다고 합니다.
사랑하며 살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도 주님의 말씀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좋고 내게 유익이 되고 오래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대로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대 교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이 기준이 된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사기를 치는 그런 나쁜 행동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의 유익에 매달려 살아가는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악한 종처럼 알고도 청종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그 범죄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과연 무엇을 범죄라고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범죄’라는 말을 하면 악한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범죄를 말할 때도 역시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하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결국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범죄도 강조합니다.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 즉 주일을 범하는 것을 죄로 말하고, 십일조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모두 행하면 죄를 안짓는 것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 5: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과연 무엇을 범죄로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도 십일조 안하고 기도 안하고 전도 하지 않는 것을 범죄로 말합니까? 아니면 살인하고 강도 짓을 하는 것을 두고 범죄로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살인과 강도 등의 행위가 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면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소위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범죄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더 위험한 것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도 아는 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전혀 알 수 없는 범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범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알 수 없고, 설사 말한다고 해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범죄가 무엇인가를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범죄함 속에 있으면서도 범죄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죄를 규정할 때 ‘사람에게 어떻게 행했는가?’로 판단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따집니다.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범죄 역시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고 분쟁하는 것이나 아니면 살인하고 도적질한 행위를 두고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었던 자신들의 행위에서 범죄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에게서 무엇을 봤을까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징벌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벧세메스에서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 인해서 오만 칠십 명이 죽는 엄청난 재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은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6:20).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궤를 들여다 본 것은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자신들의 본질을 보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동일한 불의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리신 애굽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이스라엘 안에 살아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불의함을 잊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안에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마련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들의 불의함과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인데, 벧세메스에서 그들이 제물의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은 결국 자신들의 불의함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어린양의 희생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범죄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은 이 범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1계명과 2계명이 모두 포함된 내용입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 1계명의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것과 같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라는 것이 2계명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만 섬기라고 명령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가진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에 대해 당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살려줬으니까 섬겨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불의한 자신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섬긴다면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자신들을 살게 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상은 인간의 행복과 부를 책임지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방인이 우상을 섬긴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재앙을 내려서 고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보다 더 부요하고 강한 국가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면 저런 부요함을 누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방인처럼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됨을 버려버리는 것이기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그런 행위 자체가 범죄함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를 살게 하는 것임을 잊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기에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범죄는, 인간의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으로 불의한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 것 자체를 범죄함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요한일서 5장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는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5:21절의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구절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곧 우상에 가까이 하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절에 가지 말라거나, 불상을 집에 두지 말라거나, 제사를 드리지 말라거나, 점을 치지 말라는 단순한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살게 하는데 세상사람들이 세상 것으로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세상 것으로 살아보고자 세상에 매달리는 그것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세상 것이 나를 살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나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할 때 그냥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붓고 금식하는 행위를 같이 하였습니다. 과연 그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과 물의 연관성은 홍해와 요단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이 없을 때 원망하는 죄를 지은 것도 있지만,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고 금식한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잊어버린 자신들의 범죄함을 고백하는 것과 연관된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군대에 쫓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써 살아났고, 요단강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건넘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자신들의 범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는 것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던 자신들을 하나님이 먹이심으로 살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살고자 했던 불의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는 신자들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하고 힘써 일한다고 해도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또 지금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범죄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여러분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생명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에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것은 나의 유익이 세상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유익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안에 어린양의 희생, 즉 유월절 정신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 증거로 블레셋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유월절 정신, 즉 어린양의 희생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그 정신이 살아있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유월절이 행해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여호와께 범죄함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분 자신의 불의함을 보시고 그 죽음에서 여러분을 건져내신 어린양의 피의 능력과 은혜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