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삼상 1:9-18 한나의 기도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은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가 자식이 있는 것 역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브닌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식을 힘으로 삼아 한나를 괴롭힌 것입니다. 이러한 브닌나를 성경은 ‘대적 브닌나’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대적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가 의롭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주어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로 하여금 성태치 못하게 한 것은 한나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식이 있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속성이 한나에 대한 브닌나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저주받은 자로 규정한다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어려움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결국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께 세상의 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 힘있는 자로 보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힘이 최고인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힘으로 군림하는 세상에 힘없는 자로 보내심으로 세상의 악한 속성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한나와 브닌나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힘을 견주고 경쟁하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것이 곧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자로서 중요한 것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시와 업신여김과 고난을 자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가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세상이 왜 악한 것인가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는 약하나 우리는 강해야 한다’는 식으로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함은 예수님의 덕목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길 뿐, 예수님의 약함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뛰어난 자, 힘있는 자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곧 브닌나의 모습 그대로이고, 결국 한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로 취급될 뿐입니다.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받는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10-11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합니다.

한나의 기도 내용을 쉽게 생각하면 아들이 없어서 괴롭힘을 당한 한나가 하나님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많은 현대 교회가 한나의 기도에 대해서 그와 같은 이해를 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라는 힘을 가진 브닌나에게 자신도 자식을 얻어서 브닌나를 이기겠다는 것이 한나의 기도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아들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가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오래 기도하고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결국 기도를 함으로써 죄를 범하는 결과까지 낳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라면 무조건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큰 실수입니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를 믿음이 있는 선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면 무조건 많이 하고 오래하고 자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적게 하는 것보다는 많이 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짧게 하는 것보다는 길게 오래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브닌나가 보였던 속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외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잘못됨으로 인해서 기도를 적게 하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무시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가 과연 그런 의도의 기도인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이 없음으로 인해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분해서 브닌나를 이기려고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아들을 주면 그 대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고통을 생각하시고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민 6:5절에 보면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실인에 대한 규례입니다. 나실인은 그 몸이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자로 거룩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나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를 나실인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내 아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로 바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목사되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의 기도는 결코 그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무엘이 제사장 된 것을 두고 그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무엘이 제사장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이지 한나가 자신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한나 스스로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만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오늘날의 목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에 한나가 말하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목사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흥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에 있어서 아주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직 자신의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결국 자기 일을 잘되게 해주지 않으시면 좋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잘되게 하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그처럼 악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주시면 아들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보답을 하겠다는 의도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말한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실인은 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살아갈 사람입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나실인인데 이처럼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는 별개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는 힘입니다. 꿈이며 모든 소망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들을 목사 되게 한다면 시골구석의 목사로 남기보다는 큰 교회를 이루고 유명한 목사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부모들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아들을 세상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준 아들을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아들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은 결국 한나가 아들에 대한 욕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십일조를 얼마를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했다면 한나는 분명 아들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브닌나에게 당한 수모를 복수하기 위해서 나도 아들을 낳아 성공시켜 가지고 브닌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경쟁적 사고에 의한 기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합니다. 자기 아들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힘으로 삼는다거나 아들을 통해 자기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해도 여전히 아들이 없는 자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는 무엇 때문에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아들이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훌륭한 자로 키워야 합니다.

한나의 고통은 아들이 없는 약자가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들이라는 외형적인 것으로 복과 저주를 판단하는 세상에 의해서 당하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세상과 똑같이 힘의 사고방식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아들을 받았으나 그 아들을 자신의 힘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아들이라는 외형적인 것이 결코 복이 아님을 보이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을 힘으로 삼아 아들 없는 자를 괴롭힌 브닌나의 악함을 아들이 있으나 그 아들을 버림으로써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힘으로 삼음으로써 누가 고통을 받는가를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브닌나처럼 세상의 힘을 원하고 힘없는 것을 저주로 여기는 악한 속성으로 인해서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제사장 엘리가 있었습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할 때 엘리가 그 입을 보니 음성은 들리지 않고 입술만 움직입니다. 당시 한나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엘리의 말이 당시 브닌나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외형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잘못됨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엘리는 기도는 소리내어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하면서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술 취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도를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많습니다. 기도를 할 때 속으로만 하지말고 크게 소리쳐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속으로 하는 기도는 힘이 없는 기도, 믿음이 없는 기도, 열정이 없는 잘못된 기도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느니, 하루에 몇시간 기도해야 한다느니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기준에 미흡한 기도는 뭔가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기도 분위기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외형적인 것으로 기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척을 받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인 기도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시장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들에게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가 자신들에게 의가 되었던 바리새인들로서는 싫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는 기도하는 한나의 속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만 보고 그를 판단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당시 제사장까지도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심으로써 제사장을 교체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속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조건과 외형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의해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내용이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하고 벗어나려는 기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한나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신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림으로써 약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는 기도보다는 주신 것을 버릴 줄 알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고통을 염두에 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도를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형제의 속마음은 보지 못하고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한다면 한나의 기도를 술취한 것으로 판단한 엘리 제사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자기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사단의 미혹일 뿐입니다. 기도를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사탄적 발상일 뿐입니다. 기도하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기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버리기 위한 기도로 되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