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장로가 사무엘에게 와서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왕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는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첫째는 사무엘이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절의 내용을 보면 사무엘이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다고 합니다. 즉 사사로서 재판을 할 때 뇌물을 준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서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합당한 이유며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늙어서 예전과 같이 자신들을 다스릴 수가 없고, 사무엘이 사사로 세운 사무엘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로 재판하는 악한 자들이었으니 만약 이런 상태에서 사무엘이 죽어 버린다면 결국 악한 아들들이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계속 다스릴 것인데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왕을 세워야 한다는 이 논리가 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게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강력한 지도력이 있는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민중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생활의 안정입니다. 즉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 이것이 모든 민중이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를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이루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 선거를 했습니다. 민중들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생활의 안정입니다. 부패청산 등 여러 가지 것도 말을 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생활 안정입니다. 아무리 부패를 청산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실패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물가는 치솟는 나라가 된다면 민중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 것입니다. ‘조금 부패했다고 해도 그런 대로 생활하기에 낳았던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들의 실질적인 요구입니다.
고위직의 부패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그것을 강자의 횡포로 보기 때문입니다. 약자인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강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린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지 누가 뇌물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그가 뇌물을 받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민중들의 생활의 안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큰 일을 행했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관대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활의 안정을 원하는 민중들이기에 사무엘의 아들들의 행위를 보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이스라엘로서는 왕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정치체제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5절에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방인들의 정치체제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사사체제보다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정체제가 자신들의 생활 안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민중들은 생활의 안정을 원합니다. 생활의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하게 보고 그것을 수용할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민중들인 것입니다.
서방의 공산주의가 하나 둘 자본주의 체제로 변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들이 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생활의 안정에는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이고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만약 공산주의로서 생활의 안정을 이루고 이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모든 민중들의 평등한 삶을 이루었다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로 살아가던 나라들이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살고 빈부격차가 심한 우리나라에 비해서 모든 민중들이 평등하게 부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북한의 공산주의를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이론은 비록 민중의 평등이었다 할지라도 결과는 지배계층을 제외하고는 생활의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란 체제를 악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사체제에 있던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처럼 부강하고 강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면 굳이 이방인들과 같은 왕정체제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이 없어도 잘사는데 무엇 때문에 왕을 구하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자신들의 형편이 이방인들보다 월등히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사사체제는 실패한 것이며 따라서 이방인의 왕정체제로 나가는 것이 곧 자기들이 사는 길이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6절).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을 선하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왕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강력한 지도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은 왕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해서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는 자신들의 형편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왕보다는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강한 힘을 가진 왕을 더 선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왕되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왕앞에서는 그 누구도 절대적 복종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복종을 보이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꿈꾸고 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말고 다른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적인 문제로 생각해보겠습니다. 현대교회가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두말할 것 없이 목사입니다. 그리고 국가에 속한 민중들이 지도자에게 강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민중들 역시 자기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능력있는 목사를 원하는 이유가 모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능력이라 여기고 그러한 목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은석교회에서 여러분께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목사를 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여러분께 전해주는 역할 할 사람인 것뿐이지 교회의 지도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사람의 지시를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겠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포기하고 사람의 단체인 종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목사를 중심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에 대해 싫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꿈꾸는 것은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해도 교회는 부흥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다만 말 뿐으로 받아들일 뿐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부흥을 이루어줄 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락을 하십니다. 왕을 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면 그것을 막으시는 것이 옳은데 무엇 때문에 오히려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실제 왕정체제로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막으신다면 이스라엘은 끝까지 왕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을 허락하신 것은 선물이 아니라 다만 승인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10-18절까지 보면 왕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당할 어려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이 독재군주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왕을 원하고 있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좋다. 왕이 있어야 우리가 잘 산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해서 잘만 살게 된다면 그까짓 노예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8-10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지도자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참 모습입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지도자는 말만 섬긴다고 할 뿐 결국 지배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목사 역시도 교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물론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덕으로, 인품으로 교인들을 지배하려는 목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덕을 보이고 인품을 보임으로써 자신을 추종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도자로 삼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지도자이신 그분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세상에 그 누가 여러분의 짐을 대신 질 수 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 않습니까? 헌금해라 봉사해라 목사 섬겨라고 하면서 여러분들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그는 여러분을 지배하고자 하는 거짓된 목사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들의 욕심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욕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는 것을 가리고 대신 사람을 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불신앙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크게 했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교회의 주인행세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한 사람의 부하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음가운데 있다면 교회다운 교회를 소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없고,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없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로 만나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으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예수님 나라의 백성된 표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002년도 마지막 주일에 예수님만을 나의 지도자로 믿고 살아왔던가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