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삼상 8:10-22 백성의 고집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고집했습니다. 막연하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살기보다는 능력 있고 위대한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 그를 따르는 것이 더 확실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왕의 제도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멍에가 될 것임을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막무가내로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없이 하나님만 부르는 자신들에 비해, 하나님이 없으면서도 왕을 중심으로 왕에게 복종하며 살아가는 열방들의 부강함에 마음을 뺏겨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을 구하는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려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다만 왕을 구할 뿐, 그래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 추호도 하나님을 버릴 생각으로 왕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때 이스라엘이 ‘우리는 왕을 구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고 해서 과연 그 항변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서 우리의 생각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한들 하나님이 틀리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왕을 구하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게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왜 잘못된 것인지 이유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할 때 옳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것으로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넘어서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은 장차 세상을 말씀을 기준하여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인 저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여러분께 전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말씀이 왜곡되어 전달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잘못됨을 전혀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여러분이 싫어하든 듣기를 거절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목사로서 여러분께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며 여러분에 대한 저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 곧 자신들을 잘 다스리고 이끌어갈 지도자를 구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하면 분명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버리는 심각한 잘못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것쯤이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거절하는 심각한 죄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말은 사무엘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말 듣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직접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하늘에서 외치셨다면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있는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다만 책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에 소홀해지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없습니까? ‘이까짓 것 쯤 조금 어긴다고 해서 대수겠는가?’라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외치시는 것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미 왕 제도에 매력을 느낀 그들에게 사무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왕만 있으면 우리도 열방처럼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유혹하는 뱀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잘 될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가고 넘어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잘되기를 원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내가 잘된다’ ‘교회가 잘된다’는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교회가 잘되기를 원하시고 또 잘되도록 도우시는 분이라고 아예 못박아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가 잘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며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밀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이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2-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 말씀에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신의 일과, 건강 모든 것을 잘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진리에 관심을 두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혼을 잘되게 하고 영혼이 강건해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범사에 잘된다는 것도 진리 안에서 영혼이 잘 된 것처럼 세상의 어떤 일에서도 그 영혼이 잘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랑하는 자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사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두고 기뻐하시는 것은 백성이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사도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형제를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나는 성경에 관심두고 있으니까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쉽게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가를 두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 9절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낮아지는 자리를 싫어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 위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고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악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말하며 결국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3요 11절).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육신을 잘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의 잘됨과 강건을 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영혼의 강건을 위해서 필요 하시면 오히려 육신의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곧 자신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에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진리에 관심을 두고 진리를 살핀다면 진리와 우리의 욕심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잘돼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잘됨은 교회가 오직 진리에만 관심을 두고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진정한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거절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살피고 진리를 따르기를 원하기 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행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맡은 목사로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도 아니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기에 교회 부흥을 목적으로 살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진리로만 살아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집니까? 왕을 구하는 것은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다스릴 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지시하고 다스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으로는 안되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다스리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워주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지시할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시하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진리를 마음에 전혀 두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분께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섬기라고 했으면 그 말씀대로 형제를 섬기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또 다른 지도자가 필요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생각을 기준하여 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외친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스스로는 하나님은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떤가를 보게 해주는 티하나 없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을 외면한 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목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목사란 단지 말씀을 위해서 이용하는 존재로 여기십시오. 목사를 이용해서 여러분이 말씀에 더욱 깊이 다가갈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가 목사를 지도자로 섬기고자 하는 것은 과연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스리는 왕이 계시기에 왕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다스리는 분이 분명 존재하시기에 여러분을 다스리고 지도해줄 다른 지도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는 우리의 왕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도자로 오신 그분은 자신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섬기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시면서 백성을 섬기신 분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섬기는 지도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여러분을 섬기는 분으로 오신 지도자가 엄연히 여러분과 함께 하고 지금도 여러분의 지도자로 왕으로 존재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목사가 교회를 지도하지 않으면 교회가 질서가 없고 엉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교회가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 안에서만 제대로 살아간다면 그 교회는 최고의 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계급이 아니라 섬김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섬기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