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삼상 9:1-10 사울

지난주에 제가 참여하고 있는 목사 모임에서 오랜만에 모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넥타이를 매고 오신 것입니다. 평소 편안한 복장으로 만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저는 농담으로 ‘넥타이를 맨 분이 있으니까 그분이 설교하기로 하고 예배드리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메지 않던 넥타이를 매고 온 것에 대한 의문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누군가의 부탁으로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서 넥타이를 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넥타이를 하고 가야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공서의 직원들이 넥타이를 멘 사람과 메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분명 넥타이를 하고 가면 무슨 신분이 있는 사람인가 하여 좀 더 신경을 써서 일을 처리해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평가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나름대로 그에 대해 평가하며 잘 대해야 할 사람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모두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괜찮은 자가용을 타고 나타날 때 ‘혹시 저 사람이 사회적 신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의 모든 신분이 외형에 담겨 있는 것처럼 겉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의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보다는 정장을 한 사람에 대해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모 교회가 목사를 구하는데 목사로서의 틀이 있는 목사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틀이라는 것이 무슨 박사 학위 같은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알고 ‘목사 틀이라는게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키가 크고 외모도 괜찮은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 목사님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내세울만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저같이 키 작고 외모도 볼품없는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교회의 얼굴 마담도 아닌데 키 크고 얼굴 잘생긴 것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하여 목사를 고르는 교회도 있는가 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다 같은 목사인데 키 크고 잘생긴 목사가 와야 우리 교회의 체면이 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편견없이 대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대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습성이니까 말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보면 그럴듯한 외모를 갖춘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앞에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하고 믿을만한 한 사람을 세워서 국가를 발전시켜 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처럼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을 얘기한 뒤에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을만한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9장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구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왕이 계셨기 때문에 또 다른 왕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의지하고 살기가 미심쩍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형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이방인으로부터 고통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에 대해 결코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직한 인간을 왕으로 세워 국가의 발전을 이뤄보고자 한 것입니다.

왕이란 그냥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직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을 신뢰하겠습니까? 그가 바로 1-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울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이스라엘 안에서는 존귀한 지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지파에서도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중에서는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준수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할 정도로 컸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웅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외적인 조건은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아무도 사울을 따라갈 만한 조건을 갖추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3절부터 보면 사울의 아비인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했을 때 사울이 여기저기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나옵니다.

잃어버린 것은 말이 아니라 나귀였습니다. 즉 값이 적게 나가는 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비싼 것도 아닌데 그냥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암나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5절에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울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사울이었고, 부모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려는 사울이었고,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에게 걱정이 되는 것을 삼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사울은 출신성분에서 뛰어났고, 외모에서도 월등했으며 거기에 부모에 대한 효심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도자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서 출신을 보기도 하고, 경력을 보기도 하고, 자질을 보기도 하고, 인격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고 출신이 좋다고 해도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국가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대통령을 뽑을 때는 그의 이모저모를 면밀하게 살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험악한 인상보다는 뭔가 인자한 듯한 인상에 더 호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다. 마치 그의 내면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아무리 내면에 인자함과 자비가 쌓여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가 험악할 때 내면 역시도 뭔가 포악할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사진을 하나 제작을 해도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도 신뢰와 믿음을 줄 수 있는 어투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고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안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마치 아이들을 좋아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하기도 하고, 이번에 당선된 노무현 씨처럼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통해서 뭔가 국가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애타하는 심정을 나타냄으로써 ‘저런 마음이라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국가를 위해 일하려고 하겠다’는 신뢰를 주기도하는 것입니다.

전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출마했을 때는 멀리 계시는 노부모에게 거의 매일같이 안부 전화하는 것까지 선전함으로써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은 나이든 중장년층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도자의 조건을 그의 외모와 출신 그리고 인격을 통해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격 역시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라든지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말투 등등 눈에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울은 모든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지도자다운 면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준비되고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15-16절에 보면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음으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올 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일이었으며 하나님은 사울을 이미 왕으로 세우시기를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일이나 사울이 암나귀를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한 것이나,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암나귀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고 해서 사무엘을 찾아오게 된 것이나,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음을 걱정할 때 사환에게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었던 것이나, 어디에 가야 사무엘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산당으로 제사 드리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난 사무엘을 극적으로 만난 것 모두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떤 결과를 예비해 놓으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일으키시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두고 ‘행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인생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은 내 생각과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원했던 것입니다. 영웅 같은 왕을 원하고 그 왕이 자기들을 잘 이끌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보다는 믿을만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워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을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흠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울을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바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지 못하고 부친이 자신을 걱정할 것을 염려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암나귀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사울이 하는 말이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7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고 싶어도 드릴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다만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조차도 방해하였던 것은 갖다 줄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잃어버린 암나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사울이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찾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세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 자체가 하나님이 없이는 흙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 사람이 곧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을 때 예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세상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 될 것으로 여기는 착각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인간적인 조건에서는 뛰어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릇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까? 이왕 왕으로 세우시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왕이 되게 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사무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무엘이 늙었다며 싫어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그러한 왕을 환영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수준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수준에서 지도자를 원합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을 원함으로써 그들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준에 맞추어 지도자로 오게 된 사람은 결국 인간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과의 문제에 신경 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결국 그러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사울처럼 자신의 실존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수준에서 찾는 것이고, 그것도 예물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재물을 받고 인간을 도와주는 우상의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교회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인간적인 조건을 보는 것은 없습니까? 대개 목사를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사인 저에게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면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조건이나 신앙적인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원합니까?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면이 없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을 보게 되고 인간에게서 지도자다운 면을 찾게 되면 단지 내 맘에 드는 사람만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앞에서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자고 외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자고 외치기 위해서 제가 이 은석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계로 만나지 마시고, 서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지도 마시고, 다함께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고 살아가는 한 몸의 관계로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석교회가 이러한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