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삼상 9:15-21 하나님의 섭리

사람은 각자 자기 수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구하며 사느냐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수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을 사로잡은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들의 마음은 국가 발전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무엇엔가에 빼앗겨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편안함과 좋은 환경에 눈길이 갈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기 위해서 일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날마다 이러한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 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나셨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16 절의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일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사울의 아비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시작으로 하여 사울에게 있었던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두루 다니면서도 나귀를 찾지 못한 일이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보자고 권유한 일이나, 도중에 소녀들을 만나서 극적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된 모든 일 하나하나가 우연이 아니라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도하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의 시작부터가 재미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의 시작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암나귀는 재산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울을 끌어내어 사무엘과 만나게 하신 일의 시작은 재산상의 손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울의 아비가 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시고, 사울은 아비의 말을 따라 그 나귀를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 결국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물질의 손해를 보게 하시고 인간 쪽에서는 물질의 손해를 보지 않기 애를 쓰게 되는 그 일에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은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답답해하는 것은 나의 삶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이 어떤 결과로 끝날지, 해결은 될지, 그리고 해결의 길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막막하다’고 하고 ‘답답하다’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자신의 미래와 자식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가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는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광야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결국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확실한 자신들의 미래임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발생한 모든 일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 때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확실한 미래인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 보다는 현재의 삶이 편안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이유로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전혀 다르지가 않습니다. 사울의 아비가 나귀를 잃은 것처럼 우리도 살면서 물건을 잃어버릴 수가 있고, 도둑도 맞고 사고도 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는 것처럼 우리 역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일을 겪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울의 얘기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사울에게 있었던 일들이 분명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섭리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 있어지는 수많은 일상사들도 우연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기스의 길을 잃은 나귀들도 사울로 하여금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주권속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를 이루기 위한 삶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어디로 붙들어 가실까요? 물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붙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만 바라보고 소망가운데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낸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비록 천국을 말하지만 그 천국이 굳건한 소망이 되어서 현재의 삶에서 승리하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항상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붙들어 놓기 위해서 힘써 일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의 시작은 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재산의 손해가 있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 속성을 이용하여 사울을 끌어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재물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에 재물을 잃어버리게 하고 손해가 있게 하여서 우리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완악합니다. 그 마음은 재물이 풍족할 때는 더욱 완악해집니다. 재물은 곧 힘을 의미하기에 재물이 있음으로 해서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의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일에는 힘이 되는 것을 꺾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을 동원하셔서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의 어떤 일에서도 고민하고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나를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시고 내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붙들어 놓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대부분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나쁜 일은 악한 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신의 섭리고 세상의 이치인데 자신은 악한 일도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항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순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일부러 고생을 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고서는 완악한 우리의 마음이 도무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편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마음을 주께 두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결국 힘이 되는 것,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꺾어 버리고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손에서 재물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인생의 귀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의 염려거리는 잃어버린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의 염려거리를 꺼내놓기 전에 잃은 나귀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즉 사울의 걱정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거리는 사울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해결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와서 고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 필요한 것, 그리고 우리가 무엇으로 근심 걱정하는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애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필요로 한 대로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대로 채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로 채우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도구로 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하나 만나는 것까지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무시해도 좋은 사건은 없는 것입니다. 조그만 말다툼까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께 붙여 놓기 위해서 일하시는 흔적들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도 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하는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뭔가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잘못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으시면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성에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왕을 구하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것을 도구 삼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실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왕이었지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한 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인 다윗을 등장시키기 전에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사울을 왕으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순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섭리하실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발생하는 사건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삼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