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삼상 9:25-10:8 무엇이 중요한가?

본문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자격과 권한이 주어졌음을 뜻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왕으로 세울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국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소홀히 행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을 보면 마치 지나가던 사람이 얼떨결에 왕이 되어지는 것과 같은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사울에게는 왕이 되고자 하는 계획도 뜻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왕으로서의 기름 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사울이 얼떨결에 왕이 된 것과 오늘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성경 내용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겠지만 본문의 내용을 우리의 삶에 재현시켜 보면 오늘 사울의 이야기 속에는 지금의 우리의 삶이 그대로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사울의 인생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구동성으로 ‘억세게도 운좋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릴적부터 왕이 되는 것을 계획하고 미리 준비하고 노력해 온 결과가 아니라 그저 사람 하나 잘 만나서 한순간에 왕으로 신분이 뒤바뀐 인생이 되었으니 억세게도 운좋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사건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운이 좋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울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게 되겠습니까? 가령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가 빵이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자 마침 빵집이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가서 빵을 사려고 하는데 갑자기 ‘축하합니다’라고 하면서 일만 번째 손님이라며 상금으로 백만 원을 준다고 했을 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것에 마음이 쏠리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다는 생각에 쏠리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은 할지언정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사실과 현실로서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말은 하면서도 내심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는 정도로 여기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운이 없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울 한 사람에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특별한 사건이기에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일을 이루시지만 우리의 사소한 일상생활에까지 하나님의 계획이나 작정은 필요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기스가 나귀를 잃어버린 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 것도 역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들이 사울을 왕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소하다고 여기는 작은 일 하나하나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하심을 이루어 가는 과저이며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나만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를 바로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려고 부르시기 위해 암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면 과연 나귀를 잃어버린 것이 큰 문제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문제입니까? 분명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오로지 잃어버린 나귀를 찾는 것만이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끌고 계시는데 사울은 하나님의 이끄심을 보지 못하고 다만 나귀를 잃어버렸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문제보다는 물질적인 문제를 더 크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이러한 사울과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인도하시듯 오늘 우리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인도하고 계신다면, 오늘 우리 역시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소유를 없애기도 하시고 힘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항상 보이는 것은 사울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울이 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는 것처럼 세상적인 일들을 중대한 문제로만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보다는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이 더 중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돈을 더 버는 것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6-7절)고 말씀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를 깨닫는다면 삶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꼽는다면 2-5절까지일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사울에게 있을 세 가지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일은 두 사람을 만나고 더 나아가다가 이번에는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있게 될 일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성읍으로 들어갈 때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고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사무엘을 떠난 후에 있게 될 일들인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있게 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무엘이 앞일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실 일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두 사람을 만나고 세 사람을 만나고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에 예비해 놓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그러한 일들을 준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먼저 사울이 만난 두 사람은 사울에게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비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를 인하여 걱정하여 가로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2절)는 말을 전합니다. 두 사람이 전한 말은 단순히 사울에게 아비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염려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기스나 사울에게 염려거리는 나귀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나귀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애를 써도 찾지 못한 나귀는 하나님에 의해서 찾게 됩니다. 결국 나귀 때문에 염려한 것들이 부질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찾게 될 것이었다면 그냥 안심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염려라는 것은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귀 때문에 염려한 사울의 아비 기스는 나귀를 찾자 이번에는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염려합니다.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또 다른 문제가 염려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비의 염려가 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자신은 무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왕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문제로 인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귀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사울이 두 사람을 만나고는 나귀를 찾는 일이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괜히 고생했다는 마음도 들지 않겠습니까? 나귀는 사울의 수고와 노력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게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염려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에 대해 신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두 번째로 만나 세 사람을 보면,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고 사울은 그 떡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들 세 사람은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사람들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 사람이 염소 새끼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사람들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나귀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할 때, 오늘날 우리가 범하고 있는 중대한 잘못은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울처럼 나귀를 찾는 일, 즉 세상의 일만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처럼 나귀를 잊어버린 것과 같은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산다면 평소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자신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내 삶에 아무런 문제만 없으면 그저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울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떡 두덩이를 받는다는 것은 사울이 그들 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뵈러 가는 일에 참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하나님이 사울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 선지자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으로 사울을 만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신자란 하나님을 뵙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뵈었으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세상에서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하나님을 찾은 것은 나귀 한 마리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일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귀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사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울의 잘못됨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됨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별됨을 받은 사울에게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세 사람을 만나게 하고 선지자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구별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셔서 사울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새 사람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 자로 변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적인 것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로 변한다는 것은 나귀 한 마리 잃어버린 것을 중요한 문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크게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을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7절에 보면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회라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문제들이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줄 기회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문제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가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그러한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으로 맡기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기회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를 따라 행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나귀 한 마리를 잃어버린 것을 중대한 문제로만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실체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된 자로 세우셔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문제로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에게 중대한 문제는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문제 때문에 믿음을 소홀히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