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삼상 10:9-13 새마음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본문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에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마음을 새 마음과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으로 구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새 마음을 가진 인간과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새 마음, 즉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기존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세상에 오면서 본래적으로 가지고 오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적인 성품,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기존의 마음의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 본래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 마음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옛 마음 그대로 살아가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새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에 보면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들을 만났을 때 있게 될 일에 대한 사무엘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을 때 나타날 현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징조가 다 응했다고 한 후에 10절에서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새 사람이 된 것과 새 마음을 받은 것과 예언을 하게 된 것 모두가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9절에서는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신 것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하고 새 사람이 된 것과는 서로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새 마음이 임하지 않고서 새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지 않고서 옛 마음이 새 마음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별개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분명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사무엘을 떠날 때 이미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중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새 마음을 가지긴 하였으나 아직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것은 아니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시간의 의식을 가지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울이 새 마음을 받은 후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새 마음을 받고 길을 떠나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때까지는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것도 아니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즉 여호와의 신과 상관없이 새 마음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새 마음을 받았으되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새 마음을 가지는 것과 새 사람이 된 것은 서로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3-24절에서도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새 마음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이미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새 사람 되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치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먼저 새 마음을 주시고 다음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이 된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분명 달라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는데 옛 사람 그대로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울의 달라진 모습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 되었음이 증거되었기 때문에 달라진 모습과 함께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 되었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달라진 이러한 모습이 여호와의 신이 함께하고 새 마음을 입어서 새 사람 된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새 사람 된 모습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만난 선지자의 무리는 예언을 하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들처럼 예언을 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울이 예언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었을 때 그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울 역시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보내셨다는 것은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듣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자로 만들었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새 사람이었는데 새 사람의 모습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서 예언을 들었을 때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두고 볼 때 ‘누가 과연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비록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존재하시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이야 물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못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을 뿐이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떤 큰 체험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갑자기 뜨거워진다거나 이상한 환상을 본다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해서 ‘아하 내가 새 마음을 받았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신 것은 사울이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울 편에서는 자신이 새 마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새 마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확실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선지자가 하는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도 아니고 신비하고 이상한 체험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어진 것이 곧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어떤 현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으로 충분한데 말씀 외에 다른 체험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이 아니라 옛 마음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옛 마음의 사람일 때는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곤란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귀를 잃어버린 일을 해결받기 위해서 찾는 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울이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 예언을 받아들이고 예언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사울 본래의 마음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직 새 마음이 있을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새 마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아야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새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복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그 속 심령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이 하나님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 새 마음의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세상은 재수 없다는 것을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새 마음의 사람인 신자는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신 유일한 계시인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둘로 구분합니다. 새 마음의 사람과 옛 마음의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다니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결단코 새 마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몫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새 마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새 마음의 사람이 되었는가는 체험이나 세상 것을 누리는 것으로 확인되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씀으로만 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사는 새 마음의 사람입니다.

새 마음의 사람에게는 말씀이 곧 즐거움일 것입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더욱 더 깊은 확신과 믿음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말씀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수기 11:18절에 보면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차 주어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보다는 지금 당장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옛날의 애굽 생활이 더 재미있었다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살아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그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살지 않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에는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누리는 재미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보다는 세상의 재미가 더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새 마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셨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기 때문인가를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과 평안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