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삼상 10:17-27 뽑힌 사울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새 마음이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임한 마음을 말하는데 새 마음은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이 임한 자들만 알 수 있는 비밀이므로 신자가 세상의 일을 바라보며 세상의 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 세상에 행하시는 모든 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곧 성령이 함께 하시는 새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왕으로 뽑히는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시는데 사울을 택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왕으로서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왕으로서 어떻게 행했으며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새 마음으로 예언을 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더군다나 사무엘상 16: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신이 왔다가 다시 떠나 버릴 수도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다시 버림도 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대할 때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여러분이 참고적으로 기억하실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을 때 계시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특정 국가나 특정 인물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어느 한 인간을 알리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새 마음으로 예언을 하기도 하고, 왕이 되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동과 결국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리는 모습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신자를 계시하기도 하시고, 또한 여호와의 신이 떠난 자에 대해 계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언젠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면서도 잠시 후에 ‘사단’이라고 칭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마치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세워서 성령과 사단, 양쪽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새 마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들을 사울 개인의 신앙으로 국한 시키지 마시고 사울을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점을 기억하시면 마치 신앙이 좋았다가 다시 나빠지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가 다시 버림받는 것처럼 보여 지는 사울의 일생으로 인한 혼란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으로 뽑히는 본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7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장소를 미스바로 택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왜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장소를 미스바로 택하였겠습니까? 물론 장소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또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에서 모든 장소에 의미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상 무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즉 어떤 장소에서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현재의 사건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미스바라는 장소를 생각할 때 본문의 의미는 더욱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미스바라는 장소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곳입니까? 사무엘상 6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써 오만 칠십 인이 죽는 징벌을 받았고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이십년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을 때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친 후 미스바로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회개를 합니다.

그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게 되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도우사 블레셋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에벤에셀이라고 지은 사건이 미스바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자세히 살펴본 내용들이므로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여러분께 미스바는 자기의 범죄함을 깨달은 이스라엘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된 곳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에벤에셀이란 돌을 기념으로 세운 이스라엘은 그때만 해도 블레셋에 패하고 고통을 당했던 모든 것도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곳이 미스바입니다.

미스바는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 없음을 확인시켜 준 곳입니다.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치는 곳이 미스바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러한 미스바에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 놓고 왕을 뽑는 것은 분명 그냥 지나칠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과거에 블레셋에게 패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한 그들이 이방 나라의 강한 힘과 발전을 보자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위대한 인물 하나를 내세워서 그의 힘과 도움을 의지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미스바에 모이게 해서 왕을 뽑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을 의지하려고 하는 죄악을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은 항상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나오기를 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거나 힘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거나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해서 왕을 뽑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왕이 필요 없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버리는 죄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셨고 고통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처럼 힘있고 부강한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다른 것에 마음을 뺏겼을 때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라는 놀라운 도우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사단의 손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세상 속에서 많이 가진 자로 힘있는 자로 사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처럼 여호와를 버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매 지파마다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뽑히게 되고, 다시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나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히게 됩니다.

매 지파마다 천명이면 도합 일만 이천 명이 됩니다. 결국 사울은 일만 이천 명 가운데 뽑힌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뽑았는지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매 지파마다 일천 명씩 나오라고 했을 때 그래도 자기 지파에서 잘 난 사람으로 뽑았을 것입니다. 결국 잘 난 사람 일만 이천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일만 이천 명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여 세우신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향하여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자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에 호응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장차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죽이려는 대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대적하는 역할을 위해 세워진 것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모두 만세를 외치며 호응하는 사울을 택하여 세워서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무리임을 보여주기 위해 사울을 택하여 세웠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택하여 왕으로 세운 일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인물이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뽑힌 사울은 다른 백성들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이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이 될만한 사람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즉 ‘너희가 원하는 왕의 기준으로 본다면 사울보다 나은 인물은 없다’는 뜻으로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구원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구원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부강하고 그로 인해서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방식이나 이끌어 가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가 혹 이스라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한다는 식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가지만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 챙겨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를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죄의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안다면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길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고 산다면 지금의 도우심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러한 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 왕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사울을 보면서 만세를 외치는 이스라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마음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