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삼상 11:1-5 이스라엘의 모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이토록 세상에 대한 포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믿음은 세상과 전혀 반대인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양쪽을 모두 추구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사라지게 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자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추구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을 때는 보이는 것을, 죽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영원토록 행복을 누리겠다는 탐욕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비록 천국을 말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이나 천국은 더 이상 관심을 끄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할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나 예수님이 나에게 관심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간절함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지만 정작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죽으심으로써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부족하다며 끊임없이 다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천국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영생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늘의 것만으로는 안되고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가슴에 품은 채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만으로’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혹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께 예수님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하십니까?

신자가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복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살기 때문에 예수님만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은 말뿐이지 진심으로 내 가슴에 머무는 기쁨과 감사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행복은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원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은 세상의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소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는 자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일 뿐, 참된 기독교는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 진심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못할 때 신자라 이름하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암몬 사람이 길르앗 야베스에 거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고 말합니다. 암몬이 쳐들어오자 야베스에 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섬길테니까 우리와 언약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당신들의 종이 될테니까 죽이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지금껏 지키시고 인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베스 사람들은 암문이라는 힘 앞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못쓰는 이름만의 신으로 취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지금 당장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암몬 사람들과 화친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암몬에 의해 죽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이방나라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야베스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종이 될지언정 살아남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이고 행복이라는 야베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은 돈이 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택하고 믿는 것도 행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돈이 되는 결과로 다가올 수 있을까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천국이나 영생이 관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열심히 십자가를 믿어주는 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돈이라는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 아닌 신앙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세상에 대한 탐욕에서 해방된 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본질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항상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 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고 말합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오른 눈을 빼내면 약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오른 눈을 빼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죽을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마지막을 보면 나하스가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하스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모욕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다만 암몬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조롱을 받는다는 것으로 모욕을 받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과 연관된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시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암몬이라는 존재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지지를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받는 모욕은 믿음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는 오른 눈을 빼면 화친의 언약을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야베스의 이스라엘이 살고 죽는 것이 자기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하스에 대한 야베스의 태도 역시 같았습니다. 나하스가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때문에 어떻게든 나하스와 화친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나하스라는 세상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그들이 받는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설사 나하스의 종이 된다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설사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나하스가 더 두려울 뿐입니다.

3절을 보면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눈을 빼면 화친하겠다는 말에 야베스의 장로들은 7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이유는 7일 동안 온 이스라엘 안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없으면 눈을 빼어서라도 당신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빼라는 조건에 대해 망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눈이라는 것도 소중한 신체의 한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혹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있으면 눈을 빼지 않아도 되니까 구원할 자를 찾아볼 여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구원할 자가 없으면 죽는 것보다는 눈을 빼는 것이 나으니까 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암몬이라는 문제 앞에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야베스 사람들을 보면 모든 문제를 극히 인간적으로 풀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행복을 중심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손해보다는 유익이 되는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지 눈앞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야베스 사람이 아닌 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스라엘이 암몬이라는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분명 암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굴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방인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는 길이 아닙니까?

분명 우리는 이것을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옳다고 인정하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며 살아갑니까? 혹 야베스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보다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덜 되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 숙이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모욕당하는 길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기쁨보다는 내 행복을 우선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않습니까? 때문에 항상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내 행복의 문제에 치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닫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수준이 아니라 ‘분명히 그렇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믿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고 확실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막연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믿게 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에 머물지 못함으로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고개를 숙이고 타협을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모욕 받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신자다움이지 우리의 행복이 아닙니다. 신자의 행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에 거한다면 세상 것과 상관없이,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행복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거한다면 자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을 잃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 것에서 이미 불행은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자를 찾기 위해 야베스의 사람들이 사자를 기브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자로부터 소식을 들은 기브아의 이스라엘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운 이유는 뻔합니다. 야베스를 구원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브아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야베스의 이스라엘 앞에 암몬이라는 문제를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며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어가고 해결하려고 하는 불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운다는 것은 해결한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질 길이 전혀 없기에 울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복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 앞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내 행복 문제 때문에 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의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고통이 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나의 이익과 행복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행복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은 불신앙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고 모욕을 받을 뿐입니다.

어떤 문제든 여러분의 행복과 연결하여 계산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굴복이며 타협일 뿐입니다. 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안될 때 결국 남는 것은 낙심과 울음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믿음에 굳게 세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우리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삶으로 뛰어드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행복은 세상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