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 삼상 11:6-11 하나님의 신

요한계시록 21:3,4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면 있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눈물의 의미에 대해서는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그 성분은 같지만 눈물의 의미는 결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고, 슬퍼서 흘리는 눈물, 기뻐서 흘리는 눈물, 분노로 인해서 흘리는 눈물 등등 사람에게는 수많은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 모든 눈물에 대해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신자가 육체의 고생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그 눈물에 대해 위로해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고생으로 인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고생이 없는 삶을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눈물에 대해 위로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흘린 눈물을 씻겨주시며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애통에 대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흘리는 눈물은 보이지 않고 우리의 육신의 삶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과 억울함에 의한 눈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가지고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자기 육신과 연관된 눈물입니다. 억울함과 한스러움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없게 해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눈물을 씻기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스라엘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서 살길이 암담해진 야베스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들은 눈물은 자기들에게 힘이 없다는 것에 대한 낙심의 눈물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6-7절을 보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같이 나온지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 야베스 사람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이 되었고,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이 된 사울이 이스라엘에 대해 노하여 소를 잡아 각을 떠 이스라엘의 모든 곳으로 보내며 누구든지 나와 사무엘을 좆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같이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베스 사람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울고 있는 것에 대해 사울이 노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 삼십삼만을 모아 암몬을 쳐 그들을 물리치고 야베스를 구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혹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사울을 하나님이 도우심으로써 그 힘과 능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습니까? 아마 그러한 생각이 많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를 들어 쓰시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본문 역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군사를 모아 암몬을 쳐서 승리한, 즉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그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을 개인에게 힘과 능력이 주어져서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 역시 그러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임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이든 성령이든 자신에게 임하여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힘있는 위대한 자로서 만인 위에 우뚝 서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도 성령도 그러한 의도에 부응해주는 분으로써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합니다. 먼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신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이 누구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성령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신은 성령과 일치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에는 그 이름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합니다. 가령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든 여호와든 이름만 다를 뿐이지 같은 하나님이니까 아무렇게나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여호와란 이름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이름으로만 불려질 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같은 분이지만 하나님이란 이름과 여호와란 이름으로 각기 다른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분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란 이름이 신약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관된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으로 여호와란 이름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이름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에 대한 것도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신과 하나님의 신, 또는 여호와의 신으로 등장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성령으로만 등장할 뿐입니다. 이것을 구약이기 때문에, 혹은 신약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6절에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에게 힘을 주시거나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함으로써 ‘이가 곧 나의 백성이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성령은 택한 자에게 오셨다가 그가 잘못을 할 때 떠나버리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신이 오셨다가 그에게서 떠나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본문에서도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어 이스라엘을 모르고 암몬을 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것만 본다면 분명 사울은 하나님이 택한 자입니다. 그런데 16장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자에게 성령이 오셨다가 잘못하면 떠나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성령이 떠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남께 순종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신과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오십니다. 사람의 자질을 보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잘못된 것은 성령이 일하심으로써 고쳐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해서 떠나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신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신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시기 위해 누군가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그가 곧 택한 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에 의해 붙들린 자로서의 택함일 뿐이지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은 얼마든지 사울에게서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부여받은 용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울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붙들어 쓰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사울을 붙들어 세워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노했다는 것은, 사울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 의한 노함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사울을 세워서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의 사람들을 암몬으로부터 구원할 구원자가 없다는 것으로 울었습니다.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야베스는 끝장났다는 것에 대한 절망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 울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울음에 대해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하나님의 노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왕을 구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강한 자를 원하는 이스라엘이기에 야베스를 구원할 용사가 없다는 것으로 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모으게 하시고 암몬과 싸우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사시대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위급함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바라보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스라엘에게 달리 왕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소를 각을 뜨고 이스라엘이 지경으로 보내며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같이 할 것이라고 하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여 그들이 사울에게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세운 사울을 따라 행동하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보이는 세상의 힘에 대해서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세상의 힘 앞에서 자신은 힘이 없다고 여겨질 때 울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울을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시킨 대로 움직였을 때 암몬을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좇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좇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사울을 세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사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 할만한 체험적인 일을 겪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로는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세상의 것이 없고 힘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본다면 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도 그냥 넘어가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랐을 뿐인데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