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에 한나는 하나님께 정성으로 기도하여 아들을 얻은 여인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녀 교육의 모범을 보여주는 신앙의 어머니로 교훈되어 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한나를 예로 들면서 아들이 없는 여인들에게 기도할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자녀를 잘 교육시킬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경험은 한나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것입니다. 한나의 경험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 있었던 경험들이 하나같이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어떤 경험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과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계시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보는 신자라면 ‘나도 저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라거나 ‘어떻게 하면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에 호기심을 가지기보다는 ‘저 사람에게 저런 경험을 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필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없는 한나가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러분도 아들을 낳기를 원하시고 또 소원을 이루시기를 원한다면 한나처럼 오랫동안 정성으로 기도하십시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은 보지 않고 단지 성경에 등장한 인물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히스기야를 보면 병이 들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해주신 일이 있고,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 아내가 잉태한 일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은 경험들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본 현대교회가 그들의 기도에 담겨있는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다만 기도해서 응답 받았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시는 뜻은 묻혀지고 다만 ‘기도하라’는 강조와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 받는가?’라는 쓸데없는 방법론만 난무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는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분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응답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분의 기도도 외면해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한 예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께서 자신의 몸에 있었던 가시를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나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에만 마음이 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지금 나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데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 하나하나는 단지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흔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19-20절을 보면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가 한나를 생각하셔서 잉태하게 하시고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서 흔히 추측하는 것은 한나가 눈물로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나의 고통을 생각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눈물로 기도하는 신자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 주시는 분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기도응답 받은 한나가 아니라 한나가 기도한 내용인 것입니다. 한나가 무엇을 기도하였습니까? 알다시피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한나가 아들을 구하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여인들처럼 아들이 곧 힘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성 확보와 힘을 위해서 아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브닌나에게 당하는 것이 억울해서 아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까?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내들을 보면 아들 낳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할 때는 여종들까지 동원해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고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는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는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여호와께 바쳐진 자로 여호와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서원한 사람이 나실인입니다. 그러므로 한나가 아들을 주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것은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것은 아들을 주신 보답으로 아들을 바치겠다는 의도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건을 동원해서 당시 시대생황을 고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기도 합니다. 즉 한나가 아들을 구하고 또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기도에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가 만약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으로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들이 있는 브닌나가 아들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한나가 아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잉태치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나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한나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의 죄가 어떤 것인가를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왕이 없는 당시 상황에서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술취한 여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나는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15-16절)고 말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잘못은 한나의 기도를 기도하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한나를 괴롭게 한 것이나 기도하는 모습으로 한나를 판단하는 이 모든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것, 외형적인 것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한나의 기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시는 것은 아들이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곧 구원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이 아니라 2:1절의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라는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아들을 낳았으면 ‘하나님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감사헌금하면 되는 것이지 위와 같이 뿔을 들먹이고 원수를 들먹이고 주의 구원까지 들먹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과연 한나와 같은 감사기도를 하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한나의 기도는 한나 개인의 문제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것은 그냥 한 여인이 기도해서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를 생각하사 잉태케 하신 것은 한나가 기도한 정성을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한나의 마음에 함께 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나의 마음을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의 악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명이고 브닌나처럼 아들이 곧 힘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것은 생명으로 힘으로 취급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아들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세상의 힘을 소유한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저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나를 괴롭히는 브닌나를 대적으로 표현하고, 2:1절의 기도에서도 내 원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한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원수가 아니라 사탄의 세력을 드러내는 원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힘으로 여기는 세상의 세력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며 때문에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참된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게 해달라는 의미로 아들을 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이 한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한나의 마음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는 다만 기도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 나타난 한나의 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지는 것이지 돈이나 세상의 지위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도 아들도 권력도 생명이 아니며 영원히 존재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처럼 보이는 세상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생명이 천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할 때도 그 흔적을 세상 것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세상 것이 주어지지 않은 약자로 사는 것은 죽음으로 여기며 한탄하고 낙심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의 기도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힘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지고,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한 것으로 되어지고, 남들이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과연 그러한 기도가 합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한나의 마음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고 기도하는 한나의 마음은 보이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세상에 무엇이 생명인가를 보이겠다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없는 자에게 참으로 귀할 수밖에 없는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아들을 바침으로써 아들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은 곧 한나의 편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들 있는 브닌나 편이 아니라 아들이 없는 한나 편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돈 있는 자의 편이 아닙니다. 권력이 있고 출세한 사람 편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약자로 살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악으로 인해 애통해 하는 마음 편에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애통은 바로 그러한 애통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세상에 비해 적은 것을 소유한 자신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지말고 의가 없는 세상으로 애통해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한나의 기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 내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상태의 기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은 의에 주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의에 주렸기 때문에 의가 없는 세상을 보면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어떤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신자의 기도는 세상을 고발하는 차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새로운 세상의 백성들에게서만 보여지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