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 삼상 11:12-15 새롭게 하자

교회는 오직 진리만을 말하는 곳입니다. 진리 외에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외적인 형태나 의식적인 면을 보고 ‘교회다 교회가 아니다’라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즉 예배당을 마련하고 강대상이 있고 교회용 의자가 있고 예배라는 의식이 있고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해서 교회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 아닌 교회를 그냥 두심으로써 참된 진리를 증거 하는 교회를 구별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진리만을 말할 때 교회라고 일컬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만 하면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멸망을 받아야 할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말은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도리가 되지 못합니다. 설사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외쳐지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우리를 능히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만 세상의 말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말이 아니라 진리를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새롭게 하고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사건을 일으키셔서 그 사건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읽었고 무슨 내용인지 알았다고 해서 진리를 안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여러분에게 진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분명 진리이지만 성경을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발견하고 깨달은 그에게만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암몬 사람으로 인해서 울었던 이스라엘에 사울이 등장하여 삼십 삼만이라는 백성들을 모아 암몬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하여 일했는데,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했다는 것은 신약에서 성령이 임한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누군가를 감동한다는 것은 그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붙들어서 구원시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붙들어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울게 만들었던 암몬 사람을 사울로 인해서 물리치게 되자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이 사울에게 쏠리게 된 것이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두 사울을 바라보게 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통해서 사울이 곧 자신들의 희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12절의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입니다.

10:17절부터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왕을 뽑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사울이 왕으로 뽑혔는데 27절에 보면 어떤 비류, 즉 불량자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사울을 멸시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토록 훌륭한 용사인데 감히 그런 사울을 멸시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의 말에 대해 사울은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13절)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은 여호와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말하는 그 사람들을 죽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은 암몬과의 전쟁의 승리를 사울의 힘으로 여겼습니다. 사울이 용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울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분이라고 해서 아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안계시고 사울만 있는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사울만 있으면 이스라엘의 앞날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아예 안계신 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 이것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살아계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살아계시는 분이지만 내 삶에는 전혀 살아계시지 않는 하나님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쟁의 승리를 사울의 힘으로 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힘을 볼 뿐 정작 힘은 하나님이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존재는 믿어주되 하나님의 일하심은 믿지 않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까지 믿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사울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봤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을 멸시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날이지 사울 자신이 구원한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울의 믿음으로 보고 넘어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 자의 모습으로 본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신, 즉 성령에 감동된 신자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일도 자신의 공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성령에 감동된 신자의 참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면 사람의 공로를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목사에 대해서 그러하고,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거나 일을 많이 한 사람에 대해 그러합니다. 사람이 보일 뿐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에 감동된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가 바로 성령으로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합니까?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자는 말인데 이스라엘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길갈로 가는 이유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길갈은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먼저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나오게 하셨는데 그 돌을 길갈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을 세운 뜻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시고 건너하셨으니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너게 되었음을 잊지 말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길갈에 열두 돌을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그것을 애굽의 수치를 이스라엘에게서 굴러가게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곳을 길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길갈은 애굽에서의 모든 수치를 벗게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의미가 있는 명칭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길갈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모든 수치를 벗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하는 사무엘의 말뜻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새롭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길갈로 가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는 나라로 존재하는 것이 곧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만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나라이며 참된 이스라엘이며 구원의 무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십니까?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데 혹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것처럼 확신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증거된 현장이고, 구원의 은혜가 확실하게 증거된 현장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피흘리고 죽으신 십자가가 멸망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임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힘이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공로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공로를 돌리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그것이야 말로 새롭게 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입장이었다면 우리 역시 암몬을 물리친 사울을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려고 하는 우리의 잘못된 시각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참된 것이 아니며 진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도 예배당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심령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여러분 속에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십자가만을 의지하고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참된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생도 고통도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를 놓치는 자, 그는 가장 어리석으며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그가 곧 새롭게 된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