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삼상 12:1-7 가만히 섰으라

세상은 불행을 환경의 조건에서 찾고 있지만 정작 불행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과 기쁨을 모르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것이 한 예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하면서 용사와 같은 왕이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큰 불행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스라엘에게는 용사가 되시는 하나님이 왕으로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도 행복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용사와 같은 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가진 상태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굶어죽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면서 노예로 부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의 열조를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그곳 거민들과 싸워서 승리하게 하시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태도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이점을 기억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시며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엘이 길갈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청렴성을 증거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건너게 하신 기념비 열두 돌을 세운 곳이고, 이스라엘의 애굽의 수치를 벗게 하신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길갈에 이스라엘을 모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묻습니다. 3절의 물음의 의도는 그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던 사무엘 자신이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왕을 구하였는가를 되묻기 위한 의도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사사이며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제쳐두고 따로 왕을 구한다면 분명 사무엘의 치리를 거부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의 물음을 하는 것입니다. 달리 해석하자면 하나님이 세우신 사무엘이 있는데도 왕을 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사무엘에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있다면 늙어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문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나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힘있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죽으나 사나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으로 굳게 서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사무엘이 늙고 힘이 없어졌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리할 자로 세워진 사무엘이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에 위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사무엘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래서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뇌물을 취하였느냐’라는 물음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한 부정부패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있지 않을 때 나타나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물은 것은 모두가 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입니다. 이것은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을 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무엘이 물은 것은 ‘나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가?’로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물음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따로 왕을 구하는 것입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믿음에 도움을 줄자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는 힘있는 용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는 여호와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과연 부족하신 분이었는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통에서 부르짖을 때 그들에게 응답하신 분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방인의 손에 붙여졌을 때에도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그들을 건지시고 안전하게 거하게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확실하게 다스리고 인도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왕을 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으로서 부족하신 분이었습니까? 보는 시각 여하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필요로 했느냐? 이것이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을 필요로 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달리 왕을 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필요로 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국가적 안전과 행복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부족한 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보다는 힘있는 용사가 더욱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에게 부족하신 분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갈등을 남겨주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는‘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이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신자로서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분이 아니라면 만족이 남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에게는 불만만 남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다’라고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갈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육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지 않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필요를 위해 힘쓰는 자신의 삶의 잘못됨을 감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자기 필요를 따라 행동합니다. 필요가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필요가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하는 명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필요를 따라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곰곰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에게는 ‘필요’가 우상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고 맛있는 음식이 없다고 해서 애굽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구해달라고 소리쳤던 그곳을 다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면 마치 세상에서 빠져 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멸망의 곳으로, 죄악의 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몸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단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감사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삶의 진정한 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것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식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식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다만 종교적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가 살아계시니 너희는 가만히 섰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으면 일이 되나?’라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원하고 뜻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의 필요라는 욕망이 하나님조차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따를 수 없는 말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지 못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은 믿음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에게 유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껏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을 책임지실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으로 요구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그들의 일을 스스로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왕을 중심으로 어떤 결과를 이루었을 때 그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인간은 어리석고 얕은 생각으로만 살아갑니다. 자기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불평과 불안과 염려 근심만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부족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만큼 사랑과 자비에 있어서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부족을 느낍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필요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충족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언제나 필요한 것이 없다며 달라고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은커녕 불만과 불평만 있는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섰으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섰으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필요를 따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을 살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필요로 하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필요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가 바로 가만히 있어야 할 때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이래야 할지 저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고, 정말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고민이 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서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신 분이시고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다만 필요라는 욕심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는 안된다’라는 악으로 끌고 갈 뿐입니다. 그럴 때 가만히 서서 뒤를 돌아보십시오, 지금껏 나의 필요를 따라 살아왔다는 것보다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필요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