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삼상 12:13-18 여호와를 좇으라

우리 마음에 예수님만을 두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인가 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으면 뭔가 달라지고 예수님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법도 한데 여전히 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믿음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왜 이토록 힘든 문제일까요? 믿음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기 때문일까요? 시편 37:3-5절에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진다고 믿고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여호와를 기뻐하고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쉬운 믿음입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불교처럼 삼천 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께 맡기고 여호와만 의뢰하면 여호와가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쉬운 믿음이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어려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까?

결국 이것은 믿음이 어렵다거나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에 대단한 불안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도무지 내 소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들을 소유할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스스로 힘쓰지 않고 일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여호와께 맡기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가만히 있기를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기준으로 버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선한 것이고 은혜임을 믿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만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스스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 이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어리석음은 꼭 가져봐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더 낫고 유익되기에 하나님이 그리하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주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하면서 스스로 얻고자 힘쓰는 것 때문에 삶이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수동보다 큰 능동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삶의 편안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편안함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복종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기쁨을 위해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힘써 살아가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하나님의 일에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잊지 마시고 믿음의 바른 길을 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13절에 보면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리라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14-15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원해서 왕을 세워주긴 하셨지만 그 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좇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또 왕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끝까지 왕을 세워주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은 왕을 있게 하심으로써 왕이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배우게 하시겠다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좋아 보이는 것은 가져보기 전에는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는 목사가 없다고 해도 구원 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를 의지하지 않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에 환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워주시면서 이스라엘과 왕이 다함께 여호와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목사를 세우셨으면 모든 신자와 목사가 다함께 여호와를 좇으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목사를 의지하려고 하고 목사는 신자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는 결과입니다.

목사인 제가 은석교회에 있으나 없으면 여러분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사람이 무슨 소용이며 돈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행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며 돈이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드는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을 믿지 말고 왕과 함께 여호와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보기만 해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만들어 가지고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먹어서는 안될 것을 왜 눈에 보이는 곳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다면 선악과가 내 코앞에서 군침을 흘릴 정도의 향기를 뿜으며 있다 할지라도 안먹는 것입니다.

간혹 T.V를 보면 훈련이 잘된 개가 주인이 앞에 고기를 놔두고 먹지 말라고 지시하면 절대 먹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기가 아무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 할지라도 주인의 명령이 그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에 대한 신뢰며 복종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좋은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며 말씀에 복종하는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께 돈을 주시기도 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복이라고 하며 좋아하지만 그러나 본문을 두고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의도는 돈을 주시면서 돈을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은 좋고 믿음은 시시하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믿음을 말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무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흘러간 옛말을 대하는 것처럼 해버립니다. 믿음보다도 돈이 있어야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돈 위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놓고 자기 인생에 대해 안심하고 있는 부자 얘기입니다. 부자는 인생을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돈 있으면 행복한 인생을 살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자에게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16-18절에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밀 베는 때는 4월 중순에서 6월 중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건조기여서 비 내리는 일은 물론 우뢰가 치는 일도 없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추수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해서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추수 때에 비가 내림으로써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있다 할지라도 비를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죽어야 할 우리의 목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그 소유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라 하더라도 몸이 병들어 누워있다면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물은 쓰는 재미를 누리기 위해 원하는 것인데 쓰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고 쌓아만 두고 있는 재물이라면 아무런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재물을 다 잃어도 몸이 건강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일 수가 없으며, 여러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일 수가 없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뢰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맺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에서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하셨습니다. 요단강 앞에서는 요단강의 물을 마르게 하심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놀라운 기적은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바로 사랑이며 자비며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입니다. 돈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하고 출세와 성공보다도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보다 은혜보다 세상이 더 커보인다면 우리는 분명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