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 삼상 12:19-25 여호와를 섬기라

신앙생활은 아이들의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온통 가짜들을 가져다 놓고 남편 아내 하면서 부부 놀이하고, 의사 병자 하면서 병원놀이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흉내만 내는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운전 도중 법규를 위반했을 때 경찰이 스티커를 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봐달라거나, ‘좀 싼 것’으로 끊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왕 범칙금을 낼 바에는 조금이라도 적게 내고자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6만원 끊길 것 3만원 끊기면 그나마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의 세상의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판단하실 때에는 봐달라는 것이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좀 덜한 심판으로 부탁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멸망인가 생명인가로만 구분될 뿐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들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서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모든 무리가 하나님에 의해 악한 자로 판단되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하나 거짓된 것으로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던 무리들도 동일하게 악한 자로 판단되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말로 들려 버리고, 한낱 목사라고 하는 종교인의 주절거림으로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제 말에 대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긍을 하고 이해를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서 그러한 반응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저에게는 커다란 아픔이며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저의 가르침 안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배워가며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는 열심을 보게 된다면 저에게 그것처럼 큰 기쁨과 감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소원하는 것은 말씀 안에서 다함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집니다. 천국에 있게 된 그는 성공한 자이고 천국에 있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 그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을 위해서 세상 것은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로는 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매 맞는 것은 아프지만 매를 맞더라도 제대로 된 학생으로 자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계심을 모르고 달리 왕을 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밀을 베는 추수기에 우뢰와 비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사무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이 밀을 거두어서 풍족해지는 것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설사 곡식에 피해가 주어진다고 해도 우뢰와 비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기도대로 우뢰와 비를 보내었고, 이스라엘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 사무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무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제 마음도 사무엘과 동일하다고 말씀드린다면 그 역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하나님께 수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도록 매를 때려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 중 일부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이런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내 육신 중 일부를 잃어버리고, 내 소유를 잃어버린다 해도 그것으로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고 그리스도로 굳게 세워지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기도대로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 우뢰와 비가 오는 것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을 구한 것이 곧 자신들의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오지 않는 밀 추수기에 사무엘의 기도대로 우뢰와 비가 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암몬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암몬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 왕을 구하는 것이 죄에 죄를 더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부릅니까?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란 신에게 기도하면 혹시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부르는 것은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부릅니까?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거라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신앙은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러한 것들이 감상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감상적인 것으로 머물다 보니 하나님을 찾으며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은 많은데 정작 삶은 신앙에서 벗어난 때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면 그것은 가짜를 가지고 종교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도외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죽어야 할 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한 것이 죽임을 당해 마땅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을 더한 우리를 죽이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할 내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음을 발견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은혜와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알게 되어지는 것이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깨달은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20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엘의 말은 악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면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비록 악을 행하긴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악을 깨달았으면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여호와로부터 돌이키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것이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그 마음을 한님께 두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회개인 것입니다.

흔히 회개를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회개의 일부로 포함되어질 수 있지만, 아무리 눈물로 기도하고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해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허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로부터 돌이키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21절의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는 말씀대로 세상의 것은 나를 유익하게도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인 줄로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리 봉사하고 헌금을 한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악한 것이라고 선언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뢰가 상실된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섬김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어떠한 분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족속입니까? 툭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만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왕을 구하는 악을 범한 자들입니다. 얼마든지 미움을 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크신 이름을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크신 이름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에 또 다시 날마다 악을 더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크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구나’라고 단순히 상상하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버리기까지 죄는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른 자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용납하지 않으시지만 죄인은 용납하십니다. 하지만 죄인이 용납되어지기 위해서는 필히 죄가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 일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며 은혜며 자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23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한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한다는 것은 시간적이나 규칙적인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즉 날마다 기도하던 사람이 하루 쉰다거나, 기도하는 시간이 적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다면 과연 무엇을 두고 기도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도라는 것 역시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상이나 힘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사무엘의 역할은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며 이스라엘에 대해 딴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항상 하나님만 섬기기를 기도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같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목사의 역할은 딴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성도들에게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합니까? 24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이란 8-11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신 큰일을 기억하며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고, 선지자로부터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침 받았으면 그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의 마땅한 본분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다면 마땅히 십자가가 말해주는 하나님의 큰일을 기억하며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자된 여러분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본문을 버리고 여전히 악을 행한다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