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삼상 13:5-15 망령되이 행함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를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사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요 바치는 제물이 서로 달랐기 때문도 아닙니다. 만약 제물이 아벨과 다른 것이 이유라면 제물만 받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곡식은 제물로 받을 수 없으니 양을 가져오라든가 지시하시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제물이 따로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물을 하늘로 가져가시는 것도 아닌데 어떤 제물이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를 보면 제물에 대해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가져올 수 없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제물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멋대로 제사하는 것을 금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 담기 위해서 제물을 구분하시고 여러 규례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사를 드렸으되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드렸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제사를 이스라엘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도 제물이 달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인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문제가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많은 양의 새끼들 중에서 아무 것이나 가져오지 않고 첫 새끼를 가져오고 제물의 여러 부위 중에서 기름만을 가져온다는 것은 구별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별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구별된 자로 보는 마음이 담겨 있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이 땅의 소산 아무것이나 가져왔다는 것은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는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겉을 가지고는 구분 할 수 없습니다. 겉이란 얼마든지 꾸밀 수 있고 위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속은 같아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을 담고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의 마음이 담긴 제물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담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어떤 이득을 노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는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면서도 오히려 책망을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본다면, 사울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2년에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마 사울은 암몬 족속을 이긴 것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였으며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 수비대와 싸우도록 합니다(13:2). 처음에는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블레셋 군대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믹마스에 있는 사울의 진을 공격해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은 모두 도망을 쳐버립니다. 그리고 사울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8절의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사무엘이 언제 사울에게 이레라는 기한을 정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물론 10:8절의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일을 기다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명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레라는 약속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울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의 일이고, 또 11장의 마지막을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길갈로 모아서 사울을 왕으로 삼는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일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즉 사무엘이 이레라는 약속을 한지 이년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0:8절의 약속을 나중에 되어질 본문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예언적인 약속으로 봐야 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본문의 이레를 비록 본문에서는 설명이 안되어 있지만 사울이 전쟁의 위기에서 사무엘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고, 사무엘은 이레만 기다리면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즉 10:8절의 내용은 본문의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10:8절의 내용이 본문의 사건을 염두에 둔 예언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사울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까지 칠일을 기다리라고 말한 대로 성취되어진 일이 없음을 본다면 본문의 일을 두고 한 예언적인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10:8절의 내용과 연관해서든 아니면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람을 사무엘에게 보내서 이레를 기다리라는 답을 받았든 사울은 사무엘이 이레를 기다리면 온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길갈로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되도록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1-12절)고 답합니다.

여러분, 사울의 답변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약속대로 오지도 않는 사무엘을 무작정 기다리다가 블레셋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라도 나서서 제사를 드려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해결해야겠다는 사울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오히려 따지고 보면 이레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무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분명 이레라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에 대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13-14절)고 책망합니다.

여러분은 사무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제사는 제사장만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입니다. 따라서 왕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있지 않습니까?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만 아니었다면 사울도 제멋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오겠다고 약속한 사무엘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기다리다 못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인데 그것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망령되이 행한 것으로 책망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를 주관한 것이 망령되이 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단순히 그 이유뿐이겠습니까?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예배의 주관자는 오직 목사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행동은 왜 망령된 것입니까? 12절의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는 내용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리고자 한 것은 여호와의 은혜를 받기 위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여호와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느라고 미처 제사를 드리지 못해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하겠기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은혜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에게 담겨 있는 은총과 자비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인간의 죄마저 이긴다는 것을 제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제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능력으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재함을 깨닫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곧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여기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삼계명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까? 바로 사울처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 제사를 드리는 자기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제사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렸으니까 은혜는 분명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과 동일한 현대 교회의 사고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배라는 의식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배드린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 되고, 의를 행했기에 은혜를 받는다는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헌금을 바치는 것을 의로 여기기 때문에 헌금을 한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고 때문에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속에 있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으시기 위한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으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자비와 은총이 담겨 있고, 우리를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생명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수고하시고 일하시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육신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망령되이 행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은 세상의 분주한 사정과 형편을 그대로 안고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만 악한 우리의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담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은혜를 입은 것이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는 분주한 사정을 내려놓고 오고 나가서는 다시 짊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여려가지 분주한 일들과 형편들을 하늘의 생명이라는 은혜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이겨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설사 지금 고통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을 더 깊은 은혜로 끌고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가 되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망령되이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