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삼상 13:15-23 이스라엘의 무기

창세기 10장을 보면 노아 홍수 후에 새롭게 시작된 인류 역사에 ‘니므롯’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이는 앞으로 인류가 어떠한 인간을 중심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세상은 오직 영웅만을 중심으로 흘러왔습니다. 고대 문학의 거의 대부분이 영웅들의 이야기이며 역사 역시 영웅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웅이 없이는 문학도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많이 읽히는 위인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히면서 영웅이 되기 위한 꿈을 가져라는 것이 위인전을 읽히는 부모의 소망일 것입니다. 영웅이란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혹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웅을 높이며 영웅을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영웅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영웅주의에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영웅주의는 어떤 집단내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고 관심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집단적 영웅주의는 집단의 세계 속에서 자기 집단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단이 중심이 되어 다른 집단을 이끌어 감으로서 그 집단에 속한 자신의 존재가 향상되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힘은 자신만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공유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영웅주의를 볼 수 있으며, 영웅주의 앞에서 너무 미약한 존재로 서 있는 한 민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과연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영웅을 높이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되는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사울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블레셋이 치려고 하는 급한 상황에서 사울은 기다리던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제사를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은혜를 받으면 블레셋 사람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울은 사무엘은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사울의 망령된 행위는 제사를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소유화하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고, 은혜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제사는 은혜를 부르고 은혜는 나를 구원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구원,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고 사무엘은 망령되이 행했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을 책망한 사무엘이 사울을 돕지 아니하고 떠납니다. 이제는 어쨌든 사울 스스로 블레셋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블레셋 군사에 비해서 터무니없는 숫자입니다. 거기다가 사울과 함께한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없었습니다.

19절에 보면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국가들은 철기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철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략을 하고 다스렸을 때 이스라엘 내에서 철공을 없애는 정책을 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철기 문화의 발달은 곧 힘의 상승을 뜻합니다. 철기 문화의 발달은 곧 전투 무기의 발달로 이어지고, 그것은 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뜻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 했을 것이고, 그 방법으로 힘이 되는 철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에게 내려가야 할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농기구조차도 스스로 벼릴 수 없을 정도로 철 문화가 쇠퇴된 이스라엘에게 전투에 필요한 무기인 칼이나 창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22절의 구절대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할 정도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숫적으로도 한없이 불리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블레셋 군사는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겨우 육백명이 사울과 함께할 뿐입니다. 거기다가 무기조차도 없습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싸움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한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먼저 이스라엘에게서 철공을 없이한 블레셋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철공이 있으면 무기가 발달하고 그러면 힘을 소유함으로서 블레셋을 대적할 수 있음으로 아예 철공을 없이한 것이 곧 국가적 영웅주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철을 벼리려면 우리에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즉 기술을 독점함으로서 자기의 기술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현대에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술이 곧 힘입니다. 그러므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독점하는 것만이 힘을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자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경쟁력 역시 기술에 있는 것입니다.

냉면 식당들 세계에서는 육수를 만드는 기술이 곧 힘입니다. 따라서 그 기술을 독점하는 것만이 그 세계 안에서 중심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함부로 나눠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적 관계를 봐도 이것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요즘 미국이 이집트를 공격한 것으로 인해서 미국을 다시 봐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로 인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것 때문에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우리나라 기독교 안에서도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유엔의 결의도 무시한 채 이집트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명목으로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다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량살상무기는 이집트보다 미국이 더 많지 않습니까?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힘은 인정하되 다른 나라의 힘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미국 중심입니다. 유엔조차 무시하는 미국은 가히 전 세계의 중심에 있겠다는 영웅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왜 그토록 신경을 쓰겠습니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핵무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가 미사일을 제조할 때도 미국에 의하여 사정거리를 제한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본문의 블레셋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영웅주의가 미국에만 있겠습니까? 모든 국가에게 다 있지만 기술이 없고 힘이 없어서 강한 국가의 눈치를 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미국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국가적 영웅주의에 대해 교회는 과연 어떻습니까? 과연 현대 교회는 이러한 영웅주의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시골의 약한 교회나 도시의 개척교회를 많이 보조합니다. 그런데 거의가 보조하는 숫자에 관심이 있습니다. 가령 백만원을 보조한다고 할 때, 20만원씩 다섯 교회를 보조하는 것보다는 10만원씩 10교회를 보조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수의 교회를 보조하는 것이 자기 교회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보조를 많이 한다는 것은 곧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곧 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그로 인해서 교회라는 집단 안에서 중심적인 교회로 자리를 굳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웅주의입니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우리 개인에게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아서 어떻게는 폄하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안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개입이나 시비를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영웅주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든 개인이든 영웅주의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곧 사단의 사고방식에 매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본문의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아주 나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나라인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그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0:20절에 보면 “오직 과목이 아닌 줄로 아는 수목은 작벌하여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찌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투를 할 때 취할 행동에 대해 선포하는 말씀 중에 한 부분입니다. 20절의 말씀은 간단히 말해서 나무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철로 만든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나무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분명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군사들로 무장되어 있는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이스라엘이 무기를 들고 싸운 것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을 이스라엘이 상대했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신 결과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기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칼과 창이 아님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전투들을 보면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아주 큰 성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손 한번 쓰지 않고 다만 성 주위를 돈 것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사를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은 참으로 특이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특이하듯 오늘날 교회가 특이하고 신자가 특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해야 할 교회, 신자가 특이한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게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서 철공을 없앴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신앙한다면 그것은 결코 문제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신앙하며 살아간다면 철공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는 민족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천국을 향하는 민족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일 뿐,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이 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입니까? 세상과 천국 두 곳을 향하고 있습니까? 신자는 오직 천국을 향해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의가 아닙니까? 때문에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칼과 총 앞에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웃지 못 할 모습에 지나지 않겠지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보고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의를 바라보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의 의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는 무기 같지도 않고 힘도 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있는 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관심을 세상에 두게 되면 예수님의 의보다는 세상처럼 힘을 가지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기보다 힘있는 자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자랑할 때 나는 자랑할 힘이 없다는 것으로 낙심한다면 스스로 신자의 당당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과시하고 자랑할 때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타낼 당당함이고,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것 역시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들고 나온 것 중에는 세상으로부터 경배를 받는 영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경배 받고 섬김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마귀는 끊임없이 영웅이 되라 하고 경배를 받고 섬김을 받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힘을 가지고 당당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힘없고 약하다는 것으로 낙심하지도 말고 자신을 초라하게 보지도 마십시오. 그러한 것들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천국이 과연 어떤 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당당하게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