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삼상 14:6-15 요나단의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난감하고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상식으로 되어 있는 일에 대해 잘못된 것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전혀 관심두지 않고 있는 것을 강조해야 하고 소중한 것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된 것을 말하면 누구나 거부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분명 세상의 이치와 상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반대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옳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 편에 서서 생각해 보면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의 상식에 의해 진리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묻혀지고 밀쳐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왜 세상의 상식과 이치를 따르지 않고 반대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죄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치는 모두가 죄의 산물입니다. 죄악의 세상에 진리가 등장을 하는데 세상의 상식과 이치에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진리라고 하면서 세상의 속성이나 상식에 맞는 말로 등장을 한다면 그것은 진리로 위장한 거짓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악한 세상에서 건지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길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진리의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그는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속성과 상식으로는 철저히 외면해 버릴 정도로 비상식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진리를 진리로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볼 때 비상식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난감함이 있기는 하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은 비상식의 말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남게 됨을 생각해 본다면 진리를 전하는 일에 주저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세상의 상식과 이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고 천국의 삶에 대해 알게 해주는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면 저는 여러분이야 말로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처음 시작부터 뭔가 싱거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철공을 없애는 정책을 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무기라고는 사울과 요나단이 가지고 있는 칼과 창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군사들도 블레셋에 비하면 전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작은 수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이치를 가지고 계산해 본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승률 제로라고 말할 것입니다. 일찌감치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건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쟁은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그리고 수와 수의 대결입니다. 현대전처럼 과학화된 무기로 싸우는 것이라면 수보다는 무기의 질로 승패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무기의 질에서나 군사의 수에 있어 그 어느 것에서도 형편없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 요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매우 특이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전쟁에 임하는 요나단의 자세였습니다.

요나단은 전쟁의 승패를 여호와께 두고 있었습니다. 무기의 질이나 군사의 수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결정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와의 관계 문제에 있는 것이지 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단은 블레셋의 무기나 사람의 수를 승리의 요건으로 보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져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본다면 요나단의 행동은 무모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단 둘이 적진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객기와도 같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요나단에게는 블레셋의 무기나 군사의 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에 비해 하나님은 그들과는 비할 바도 없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비록 자신들은 단 둘이지만 능히 블레셋을 이기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믿음을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는 말처럼 앞뒤 상황을 재어 보고 판단을 해서 일찌감치 블레셋에게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까?

요나단의 믿음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을 재점검하게 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들이 비록 믿음을 말하긴 하였으나 결국 믿음이 없는 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음을 스스로 자인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한 무기나 사람의 수에 의해 결코 기가 죽지 않는 요나단에 비해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 싸우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 목숨을 빼앗은 싸움은 아니지만, 서로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기죽이기 위한 싸움에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에 말려든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할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기죽이는 싸움 자체가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믿음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자인 저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적은 수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수의 많고 적음에 매달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를 늘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 스스로의 속마음을 점검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수에 있어서 민감한 것은 세상이나 교회가 모두 동일할 것입니다. 양적 팽창을 성공과 힘으로 여기는 사고로 존재한다면 세상이든 교회든 구분 없이 수의 팽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수에 민감하다는 것은 누구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수에 대해 초월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때때로 교인들의 수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 머물고 그 생각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고, 또 거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가 적다는 것이 자랑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문제도 아님은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제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은석교회의 적은 수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 아님을 굳게 믿기에 저는 수의 적음을 두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은 수로 인해 기가 죽거나 상대방의 많음을 두고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의 수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사람의 수만을 두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며,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문제를 두고 생각해 봐야 할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의 수를 돈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되고, 아니면 지위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신앙의 자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은석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로부터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아가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겠습니까?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요나단 신앙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수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힘을 내세운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말리지 맙시다. 부러워하지도 말고 기죽지도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수가 있다 한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 받을 존재라면 수의 많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에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구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문제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에 민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수의 팽창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까? 저는 성경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수의 팽창을 기뻐하신다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은 실패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삶을 목회로 견주어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목회는 실패한 것입니까? 모든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하나 점검하고 짚어 본다면 과연 무엇이 진리이며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작업을 귀찮아합니다. 아니 어쩌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달리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까? 본문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만이라도 우리의 기본 생각과 상식을 점검하면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진리의 길을 가는 신앙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 교인은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진리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오직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 가치입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은 다만 그 일에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키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성경을 펴 놓고 조금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을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우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되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성장=하나님이 돕는 교회, 하나님이 돕는 교회=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구원받는 교회'라는 공식에 의해 스스로의 신앙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 자체가 불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장을 의로 보고, 하나님을 성장을 위한 분으로 여기며 성장하지 못한 것으로 패배감을 느끼고 있고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을 할례 없는 자들로 일컫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이라는 민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할례 없는 족속과 싸우는 것입니다. 즉 할례 있는 자와 할례 없는 자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할례 있다는 것은 의를 말합니다. 할례 한 것 자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할례가 곧 육신을 끊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례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할례가 없다는 것은 끊어버린 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즉 육신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모습만 드러내는 것이 할례 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치는 것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면서 한숨쉬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할례 없는 모습을 치기 위해 말씀을 동원하시고 믿음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며 살게 합니다. 사람의 수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중에 세상의 것이 얼마가 있든 그것은 내 육신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거지인 나사로가 천국에 있고 부자가 지옥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십니다. 재물이 우리 육신을 보장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물도 육신의 노쇠는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혼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부르시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재물을 믿고 의지하며 재물로 자신을 과시하고 힘으로 삼는 것 자체가 할례 족속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를 책임지는 것은 ‘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저와 여러분을 책임집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천국을 보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이 여러분을 천국에 있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진정한 힘을 찾으시고 의지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