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삼상 14:16-23 사울의 종교성


현대 교회는 종교적인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우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은 극히 종교적일수록 더욱 수준 높은 신앙인 것으로 오해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신앙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점을 소홀히 여긴다면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으로 여기며 스스로 속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고 천국을 말하는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분명히 언급을 해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신앙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분명한 차이라고 할 것 같으면 종교는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반면, 신앙은 자신의 행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는 자신이 신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거나 기도를 했을 때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신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거나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자신이 무슨 행위를 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도우시고 일하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행위를 부정한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과연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다가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분명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신에게 다가갑니다. 신 앞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으니까 신이 나에게 복 준다는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종교성이 있는 것인지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난 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유는 벗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벗은 몸으로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옳지 못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음을 스스로 판단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항상 신에게 떳떳해지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려고 힘쓰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무엇을 옳은 것으로 보시는지에 대해 무지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옳은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자신을 옳게 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복을 받는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뭐겠습니까? 옳다고 믿는 행위를 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모든 종교인들에게서 보여지는 것과 공통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종교성과 신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해봐야 결국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잘못된 신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똑같으니 이리 믿어도 되고 저리 믿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곧 사단이 여러분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리 믿어도 되고 저리 믿어도 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그토록 책망을 하시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섬긴 것은 그렇다 해도 열심히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친 것에 대해서까지 책망을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가르침 받고 배우고 깨달아서 우리의 신앙을 고쳐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신앙인가를 분명히 가르치고 드러내기 위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러합니다. 사울이라는 한 사람을 세워서 무엇이 신앙이 아닌 종교성이며 무엇이 신앙인가를 구분하여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요나단이 병기든 사람 한 사람만 데리고 블레셋 군대의 진으로 가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나단에게 그런 용기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많고 적음을 보시고 구원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블레셋 군대의 숫자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전쟁에 사울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해서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블레셋을 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이 블레셋의 진영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16절). 그리고 사울은 자기들 쪽에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해 보도록 지시하게 됩니다(17절). 사울이 이러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아마 블레셋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기들 쪽에서 누군가가 가서 일으킨 일이 아닌가 생각해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합니다(18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서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까지 계속 있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7:1-2).

그리고 70인역에는 하나님의 궤가 아니라 에봇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언급하면서 사울은 아히야에게 궤가 아니라 에봇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궤에 대해 ‘가져오라’는 어투를 사용하지 않다는다는 점을 들어서 궤가 아니라 에봇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황이야 어쨌든, 그리고 그것이 에봇이었든 하나님의 궤였든 상관없이 사울이 그것을 가져오라고 한 의도에 중점을 둬야 할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인 요나단이 가있기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 블레셋이 혼란해진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은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할 생각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사울의 마음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20절의 보면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는 구절을 보면 사울이 갑자기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일어난 혼란이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혼란이 더욱 커져서 가서 그들을 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종교성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수를 보고 구원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블레셋 사람의 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감히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할 마음도 가지지를 못하더니 블레셋 사람들에게 혼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보고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 늦게 왔을 때 자신이 나서서 제사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13:9-10). 그때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부득이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 앞에 행하는 어떤 의식을 의존하고 이용하는 종교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바로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상황이 블레셋이 완전히 무너질 것으로 판단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울을 보면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상황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만 필요한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도 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전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도 잊고 살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을 필요로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뭔가 종교적인 행위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구하다가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될 때 다시 하나님을 필요치 않는 태도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신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요나단과 사울의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요나단과 같은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누구시가를 굳게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보이는 상황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행위를 보시고 자신에게 다가오시고 도우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의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나 기도와 같은 행위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자는 예배를 드려도 ‘예배를 드렸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복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려도 여전히 나는 부족한 자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된 자신은 무엇을 해도 죄인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행위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자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는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겸손인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것이 곧 신앙이 아닌 종교를 가진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문제가 없기 때문에 신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한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고, 상황과 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문제임을 깨닫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14:14절에 보면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멋대로 제사를 지낸 사울에게 한 사무엘의 말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것보다는 어떤 의식과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려야 은혜를 받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는 분이지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시면서 도와주기를 결정하는 분이 아님을 몰랐던 그것을 곧 하나님을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신앙인가 종교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여겼던 것들이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종교에 머무른 것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으로 고쳐가며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 7:22-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이지 우리가 행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렇다면 예배 안드려도 되고 기도 안해도 되겠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도 결국 자기 행위를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봐주면 하고 안봐주면 안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만 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한 신자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소홀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여전히 자기중심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서 있는 신자라면, 예배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종교 행위와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천국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 역시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한편 강도가 무엇을 한 것이 전혀 없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것입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또 사실 천국은 믿음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믿음을 말할 뿐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한시라도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찾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 말고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그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종교에 거하지 말고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종교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만 신앙은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