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삼상 14:24-30 사울의 맹세

지난 주일에 사울의 종교성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종교와 믿음에 대해 혼동하지 말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종교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평소에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급한 문제가 있게 되면 자연히 초월적인 존재를 찾아 의존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무신론자는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이러한 종교성과 믿음이 구분되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종교성이 믿음의 행세를 하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현대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유대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교성과 믿음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종교성은 오직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뿐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만을 추구합니다. 내가 높여지기보다는 하나님이 높여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하나님만을 경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믿음의 차이는 또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허전해 하며 눈에 보이는 것, 몸으로 경험하는 것에 더욱 더 확실성을 가지며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의존하지 않지만 종교는 인간의 행위를 의존하여 신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착한 행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열심, 이러한 것들이 자신과 신을 연결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면서 행위 여부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다른 것처럼 가르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와 공로를 더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울과 요나단의 이야기에는 종교심과 믿음이 서로 대립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가 사울과 요나단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과연 바른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또 다른 면에서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구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블레셋과 전투를 하는 상황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 식물을 먹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함으로써 백성들은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싸움에 임했던 것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배가 불러야 힘이 날 것이고, 힘이 나야 잘 싸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오히려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울이 무엇 때문에 금식을 선포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했고,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 해서 도움을 구하려고 했던 사울을 생각해 보면, 금식 역시 자신의 신앙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혼란을 보면서 저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제사장에게 손을 거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싸우기 전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함으로써 승리가 자신의 신앙 때문임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의 신앙과 힘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금식 선포는 또 다시 그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도와 의식은 자신들의 의와 신앙을 과시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라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23절에서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준하여 보면 사울이 한 금식선포와 같은 행위는 자의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금식 자체를 전혀 유익이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의적 숭배’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금식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날이나 절기 등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령 신자가 주일을 잘 지켜서 자기 신앙의 의를 세워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자의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금식 선포를 이처럼 자의적 숭배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면서 맹세를 시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백성들에게 법을 선포한 것입니다. 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것이지 사람이 제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사울의 위에는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울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입장에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해야 할 역할을 하는 것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인데 마치 자신을 위한 자기 군대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서 선포하고 자기의 법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저주란 사울의 법에 순종치 않을 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때 임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상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블레셋을 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복안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멋대로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저주를 받을 자 복을 받을 자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소유처럼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현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마치 사울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분 홀로 교회의 머리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위해 피흘린 것이 있습니까? 목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역할로 세워진 것뿐입니다. 목사 역시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그리스도를 배우며 자라가야 할 위치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대다수가 그렇지를 못합니다. 거의 일반 성도는 넘볼 수도 없고 함부로 반박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목사를 반대하면 저주 받는다’ ‘목사를 잘 섬기면 복 받는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음식을 먹으면 저주받는다고 엄포를 놓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목사에게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서 저주를 받거나 아니면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25-26절을 보면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명령대로 금식에 대해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전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수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꿀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꿀을 봤는데 그 꿀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꿀을 입에 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식 하겠다는 맹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맹세를 깨면 저주가 임할까 두려워서 꿀을 먹지를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 역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승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한 맹세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한 맹세인데 하나님은 자신들의 맹세를 기억하고 계시고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감시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의적 숭배인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운 후에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에게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실수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한번 빠져도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여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가려주신 것인데, 여전히 실수와 허물에 대해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벌 받을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것에 대한 애통함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자다운 모습은 사울의 금식선포에 매이지 않은 요나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맹세하게 한 일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꿀을 먹게 됩니다. 그때에 백성 중 하나가 사울이 누구든 음식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임을 선포한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요나단은 “내 부친이 이 땅을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늘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29-30절)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저주에 대해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맹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곤란케 하였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블레셋에 대해 승리하게 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저주에 대한 맹세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음을 알았기에 이 땅을 곤란케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지 못함으로써 사람의 말에 매이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생명처럼 살아있는 신자라면, 사람들의 잘못된 말 때문에 엉뚱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갑니다. 이 생명에 대한 믿음과 감사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에 매이게 되고, 자신의 행위를 보며 쓸데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자는 저주 받을 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징계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붙들어 놓기 위해 취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입니다.

신자는 이미 복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복과 저주 사이에 있다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복과 저주로 갈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복안에 거하면 그것은 영원한 것인데, 복안에 있다가 뭔가 잘못한게 있으면 다시 저주로 옮겨지고, 또 다시 잘하면 복으로 옮겨지는 것이라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저주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원한 복안에 거하게 하였음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보호하는 이상 여러분을 저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