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삼상 14:36-46 죄가 뉘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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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도 결코 잘못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선민의식을 가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기면서도 선민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즉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이 되게 하신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기를 철저히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실현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제사 드리기를 게을리 하고 제물 바치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악행을 그칠 것을 외치는데, 선지자가 외치는 악행은 고아와 과부 즉 약자를 학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이라는 법을 지키고 제사와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약자를 도와주고 위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가 곧 사랑을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는 규례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부지런히 갖다 바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 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항상 성경을 넘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선에서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 교회에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십일조 하고 시시때때로 감사헌금 잘하고 열심히 성경 보며 기도하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 1:23절을 보면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이 책망에 이스라엘이 제물을 안바친 것이 나옵니까? 제사를 안드린 것이 나옵니까? 아무리 열심히 십일조하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의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약자를 위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단순한 성경책이 아니라 참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절대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고 우리 멋대로 우리가 만든 몇가지 법칙을 실천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몇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가지 규례만 지키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고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게 한 것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신앙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제정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자기 멋대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자기 멋대로 상상하여 이런 저런 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령 예배를 경건하고 거룩히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시간에는 정장을 하고 와야 한다거나 깨끗한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규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늦는 것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하면서 미리 와서 찬송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된다는 법을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절기에는 얼마 이상을 헌금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성경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법을 만들어서 교인으로 하여금 자기 법에 복종하게 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의 잘못됨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1절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배가 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를 가져다가 피 채 먹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미처 피를 빼지 못하고 급하게 요리를 한 것 같습니다. 레위기 19:26절의 규례를 보면 고기는 피 채 먹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레 17:11).

즉 하나님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누구든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법의 의미인데 사람들은 법의 의미를 보기보다는 법 자체를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알게 된 사울은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소를 끌어다가 정결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지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누구를 위해서 단을 쌓은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백성을 위해서입니까? 사울은 자신을 위해 단을 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피를 먹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사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여 단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라 단지 죄를 해결받기 위한 단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동안 단을 쌓지 않은 것은, 단을 쌓은 필요를 느끼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급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다가 급한 상황이 물러가면 도움을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을 쌓을 필요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승리에 대한 감사의 단을 먼저 쌓은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단을 쌓았다는 것은, 결국 죄로 인해서 올 수 있는 징계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죄를 짓고 나면 헌금을 더하고 주일을 더 잘 지키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은 사울이 다시 블레셋을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때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유하고, 사울은 하나님께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칠 것인가를 묻습니다(37절). 그런데 사울의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대답을 안하십니다. 이것을 사울은 이스라엘에 내에 죄가 있기 때문으로 단정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들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 요나단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39-40절을 보면 결국 죄인으로 요나단이 뽑히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사울에게 꿀을 먹은 사실을 고하게 됩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에 대해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절)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요나단의 행위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과연 요나단의 행위가 죽어 마땅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선포한 금식에 대해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자신의 물음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분명히 하나님의 규례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울이 세운 법을 이행치 않았을 뿐입니다. 사울의 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자기 멋대로 부과한 규정이며 규칙일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짐이며 고통일 뿐인 법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사울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고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삶의 규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운 규정이나 규칙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의 법보다도 사람이 세운 규정과 규칙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절대 원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것이며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넘어서 사람이 또 다른 규칙과 규정을 만들어 요구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한 예배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예배 참석자의 옷차림이나 시간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옷차림이나 시간 준수 같은 것이 예배의 경건성을 만들어 낸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것을 제멋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내세워 요구한다면 그것이 곧 성경을 넘는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시간준수와 같은 것은 강요할 규칙이 아니라 형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와질 수 있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히려 인간이 세운 법적인 문제들이 자신은 의롭게 여기고 타인에 대해서는 죄인 취급을 해버리는 오류를 가져올 수 있음에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사울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사울은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게 한 그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설사 내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요나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단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요나단이 죄인으로 뽑히게 되고, 요나단이 사울의 금식 선포를 어겼음이 드러남으로써 사울은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백성들은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즉 요나단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죄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까? 사울과 요나단이 뽑혔는데 요나단이 죄가 없다면 남는 것은 사울이 아닙니까? 결국 사울이 죄있는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 대해 화를 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요나단이 죄있는 자가 아니라 자의적인 명령을 내려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한 사울을 죄있는 자로 규정합니다. 백성들이 고기를 피 채 먹은 것을 금식으로 인해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 미처 하나님의 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고기를 먹은 것이라면 사울의 법이 오히려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에게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뉘게 죄가 있는가 알아보자고 하였지만 정작 죄는 자신에게 있음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실천할 때 그것을 마치 신앙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세운 법을 준수함으로써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에서 예배 시간 몇 십분 전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결국 그 말대로 몇 십분 전에 온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 되고 늦게 온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곧 사울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법을 요구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법에 매이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이것이야 말로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시간의 법을 제시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시간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에 화를 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짐이 되지도 않고 우리를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넘어서 인간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규정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이 짐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 규정한 법에는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불의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면서도 이상하게 신자들이 말씀을 듣기보다는 사람의 말을 더 즐겨 들으려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대해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점검하고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맞는 말 같으면 무작정 받아들이는 실수를 멈춰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넘어서 다른 것을 덧붙이는 것은 악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신앙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보다 더 앞서 나아가고, 더 많은 것을 행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넘어서는 악한 행위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울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