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삼상 1:21-28 아들을 바침

본문의 내용은 이제 막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과 상관이 없는 한나라는 한 여인에게 있었던 일로만 여기기보다는 모두 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모의 심정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린 아들을 떼어놓아야 하는 부모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을 대하는 신자에게 한나와 똑같은 행동과 삶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 자식이 주어진 것은 한나와 다른 상황에서입니다. 자식이 없다고 해서 괴롭힘을 당한 일도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서 천대를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간혹 사회 한구석에서 아들을 낳는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들려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핏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아들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투쟁하는 이야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한나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언급을 한 것처럼 하나님은 브닌나에게는 아들을 주시고 한나에게는 아들을 주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세력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소유된 것들이 희망과 삶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망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절망과 죽음의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브닌나는 아들을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한나가 절망의 상태로 보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있든 인간의 상태는 죽음이며 절망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브닌나로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은 돈과 아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있는 사람도 아들있는 사람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죽음이며 절망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자신의 희망을 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를 등장시킴으로써 아들이 결코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자에게는 단순한 성경 이야기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을 지나 영혼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한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고하게 하는 사건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6:1-2절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는 말씀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더욱 깊은 헌신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며 평생토록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나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이며 사랑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자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나의 행동에서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양육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브닌나는 아들을 자신의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절망의 상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희망이었기 때문에 아들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의 것을 희망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희망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는 희망을 두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둘로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천국을 가는데는 그리스도가 희망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돈이 희망이고 자식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는 소홀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천국의 문제에서 희망이 되는 분인데 세상을 살아갈 때 천국은 멀리있는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히 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고 제사장 엘리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사무엘을 실로로 데려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머니가 젖을 뗀 아이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했었던 서원과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한나는 사무엘을 자신의 아들로 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27-28절을 보면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아이이기에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이제 막 젖을 뗀 세 살 난 아들을 제사장의 지도와 감독 아래 있도록 갖다 바치는 것은 보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한나가 겪는 고통과 희생이 있음은 뻔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희망으로 여기는 아들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어머니라는 인간의 정으로 양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바친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자신의 자식으로 잘 길렀다고 해서 사무엘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을 잘 양육을 해서 성공시켰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들이 천국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자식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브닌나처럼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삽니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꿈과 소망을 실현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자식을 내 자식으로 여기는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부모라면 자식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식으로 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식으로 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기르게 해달라는 것이 진정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한나에게서 자식을 양육하는 부모의 태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식을 나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식을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희망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식의 구원만을 생각하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식의 구원만을 생각한다면 자식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역할이라는 것이 단지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고 결혼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부모의 도리를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면 그것이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식들도 자기 부모가 다른 아이들의 부모처럼 해주지 못할 때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곧 부모의 책임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부모의 도리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양육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식이 잘못했을 때 나무라면서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자식이 귀여운 것과 나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귀엽기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것은 이미 부모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귀엽게만 봤다면 제사장에게로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젖을 뗀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애타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귀여운 자식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게 하신 길을 가야할 자식으로 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이 마음이 될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이 신앙의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적인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꾸짖고 매를 들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신앙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구원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부모의 분명한 의지가 보여져야 합니다.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가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식으로 하여금 ‘우리 부모는 신앙의 문제보다는 공부 잘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면, 먼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생각부터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이 아닌 내 자식으로 여긴 것은 아닌지, 그리고 자식을 자신의 희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식의 구원보다는 세상의 출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부모 자신부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이 겨우 주일에 교회 가는 것과 헌금하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가면서 자식에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회에 소홀히 하고 신앙적인 문제를 조금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신앙적인 문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한 후에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세상에서 자신이 잘되는 문제가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부모 역할에서 이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회사에 취직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버렸습니다. 자녀에게 세상에서 잘사는 법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자라면 자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라고 여러분에게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무엘을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한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신 그 이유와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나의 헌신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헌신은 자식을 양육하는 데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일에 부지런하고 헌신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을 양육하는 문제에서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면 그의 헌신은 사실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헌신인지 아니면 자신의 체면과 이름을 생각한 헌신인지 말입니다.

자녀는 여러분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맘대로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자된 부모의 생각이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자식은 하나님이 맡긴 큰 책임으로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키우면 그 자녀가 신앙으로 훌륭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의 자녀들이 신앙적인 자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신앙으로 양육했다고 해서 그 결과가 신앙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부모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입니다.

신자가 가진 소망은 영원한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것을 신자는 알고 있고 그 나라가 곧 올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자녀가 다른 아이에 비해서 세상적으로 뒤떨어진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녀의 희망은 그리스도지 공부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러한 마음을 자녀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제사장에게 맡기는 한나의 마음을 생각하시면서 신앙인의 부모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시고 내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