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삼상 15:1-9 사울의 불순종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아말렉과 싸워서 그 민족을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명령을 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이방 나라의 왕과 분명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나라의 왕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권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말 그대로 왕에게 명령할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 나라의 왕은 명령을 내리고 다스리는 사람이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같습니다. 이방 나라가 비록 신을 높은 존재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명령하는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방의 신, 즉 우상은 명령을 내리는 관계에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대로 그 나라를 잘 보호해주고 지켜주면 되는 수호신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이신 하나님은 다릅니다. 선지자인 사무엘을 보내서 하나님의 명령을 왕에게 전달하고 그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왕의 역할은 자신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여 시행하도록 다스리는 역할로서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때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는 결과로 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요구되는 것은 순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오직 말씀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계산과 판단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에게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치가 높아질수록 존재가치가 향상됩니다. 존재가치가 향상 될수록 명령을 받기 보다는 명령을 하게 되어집니다. 세상은 명령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명령을 하는 것은 높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명령 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을 상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명령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명령을 내리고 받는 상하 계급 사회가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서 일을 분담하는 수평관계로 전환되어 가는 분위기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교회는 인간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평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수직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명령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리는 명령은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명령을 내린다면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왕으로 군림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와 장로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높이 여기는 목사와 장로라는 위치를 명령하는 자리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진 명령을 백성에게 전달해서 그대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목사 역시 이러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독려하고 때로는 감시하는 역할이 곧 목사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따로 자신이 내려야 할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 완벽한데 또 다른 명령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목사 개인의 사심이 작용된 결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는 목사 개인의 욕심을 이뤄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명령외에 자신을 위한 자기 명령을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위치에는 이런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는 것이 목사인 것입니다.

본문의 사울은 이런 점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실패가 우리들에게 큰 교훈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실패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3절)는 것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완전 전멸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각에는 분명 너무 가혹한 명령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젖먹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까지 죽이라고 하시는가?’분명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식은 세상에 맞춰져 있는 반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하는 이유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2절)라고 말씀합니다. 즉 과거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로 인해서 아말렉을 진멸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8절부터 보면 아말렉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싸움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14절 하)고 하시고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는 맹세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아말렉은 대대로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은 아말렉을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신명기 25:17-19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멜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너는 잊지말찌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말렉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친 것은 광야의 노정에서 이스라엘이 피곤하고 약해진 틈을 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약한 틈을 타서 치는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 아말렉이 보여준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곧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이며, 하나님이 진멸할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피곤하고 약해진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지 확인하시기 위해 고의로 이스라엘을 약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치는 것 자체가 자신의 힘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아말렉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말렉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대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철저하게 미워하시고 진멸코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우리가 곧 아말렉의 모습에 빠질 수 있고 결국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피곤하고 지친 약자가 보인다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약자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이 앞선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인간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을 보기 때문에 힘이 없는 약자에 대해서 내가 무시해도 될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를 약하게 하시고 피곤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자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를 약자로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약해진 틈을 타서 무시하고 조롱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아말렉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지시하고는 자신은 아론과 홀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든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밑에서 싸우는 여호수아와는 전혀 상관없이 승패는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홍해를 갈랐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 지팡이었습니다. 즉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만 손들고 있으면 되는데 왜 굳이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의 승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 자신들이 칼 들고 싸우면서 승리는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모세를 바라보면서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자신에게 있는 것이 결코 자기 힘의 결과가 아님을 아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해야 하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사울이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8-9절을 보면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아말렉의 왕 아각과 짐승 중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사울의 이러한 행위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사울의 행위를 단순히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사울의 행위를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하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사울처럼 아말렉과 싸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을 친 아말렉의 행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자신의 힘을 믿고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명령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에 순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각과 좋은 것을 남깁니다. 이것은 일단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의 마음에 함께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아각을 사로잡아 온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에서 왕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 나라를 정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힘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울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아각을 사로잡은 것은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 있음을 망각한 행동인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음을 잊지 않았다면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명령대로 아각도 죽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 중에 좋은 것을 남긴 이유 역시 동일합니다. 사울은 양과 소의 좋은 기름진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과연 사울은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을 낮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겠습니까? 분명 크고 건강하고 살찐 것은 좋은 것으로, 작고 약하고 볼품없는 것은 낮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곧 아말렉과 동일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말렉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봤을 때도 이스라엘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피곤하여 지친 모습만 보면서 낮고 약한 존재로 판다했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벌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울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산다면 우리 역시도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가치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길 것이고, 반대로 힘없고 돈이 없어서 교회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힘있는 자가 되려고 힘을 쓰게 될 것이고, 좋은 것을 소유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아말렉의 방식이며 사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말렉과 같은 사고방식이 나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있는 아말렉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항상 좋은 것은 남기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들이 나에게 득이 되고 힘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에서 구출 받은 신자에게 좋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서 사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죄인인 나는 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지 않으며 힘을 가지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명령을 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고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나도 모른 사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나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분명히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좋은 것이 아까워서 없애지 않고 남겨 놓은 사울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곰곰이 묵상하시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