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삼상 15:17-23 순종이냐 제사냐

‘순종이냐 제사냐’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곧 제사며 제사가 곧 순종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오랫동안 흘러내려오던 관습에 고정된 생각일 뿐입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제사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제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를 알지는 못하지만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없는 종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란 곧 신을 섬기기 위한 의식인데, 제사가 없는 종교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필히 제사라는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종교는 제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우리의 정성어린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까지 공통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라는 의식에 인간의 모든 정성을 담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는 물론이고 현대의 기독교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아주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제사, 즉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사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결국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고, 참석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께 순종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거의 강요되다시피 되어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현대 교회의 제사, 즉 예배 자체를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만약 현대 교회의 예배를 부정한다면 은석교회에서는 예배 모임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일단 본문의 내용이 그러한 가르침을 하기 때문이고, 더 중요한 것은 행여 우리가 사울처럼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면 가장 먼저 여러분의 관습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습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습을 포기하라는 것은, 관습 자체를 없애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관습에 담고 있었던 생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복을 받는 길이라고 여겼다면, 바로 그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습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의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음으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서 짤림을 받는다면 결국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은 멸망 받을 존재가 아닙니까?

사무엘은 사울의 행위를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술이란 점을 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행위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는가는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행위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울에게 사무엘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것은 아말렉을 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인 아각을 사로잡고, 짐승 중에서도 가장 좋은 양과 소, 그리고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게 됩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을 때 당당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13절). 그러자 사무엘은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때 사울은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긴 것입니다’(15절)라고 답합니다.

본문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듭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전히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소와 양을 취하였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남긴 것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했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순종만 있으면 제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말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제사가 곧 순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에 대해 살펴본 대로 사울은 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선견자에게 물으러 갈 때는 수중에 예물이 없음으로 가기를 주저했습니다(9:7).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갈 때는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과 전투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번제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13:9). 제사를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도움을 청하였지만 자신의 힘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질 때문에 도움청하는 것을 중지하는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14:19). 그리고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군사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를 하게 할 정도로 종교적 의식과 행위에 비중을 크게 두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을 생각해 본다면,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소와 양의 좋은 것을 남겨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울과 같은 종교적 성향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종교적 의식과 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을 뛰어 넘어 더 세부적인 실천 조항을 만듦으로서 하나님을 더욱 더 정성으로 섬기고자 했습니다. 결국 율법이 그들의 의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 책망하셨습니다. 즉 의식을 행하고 뭔가를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의식에 크게 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예배라는 의식에 갇혀 있습니다. 의식을 떠나서는 신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이 곧 예배이며 예배가 곧 신앙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 의식에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을 두고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제사가 순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제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을 말씀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식은 하나님에 대해 중요한 신앙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곧 말씀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살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몸에 배어 있는 관습 자체를 성경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교회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지금 교회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의식적인 것들이 과연 성경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인지를 역사적 자료를 찾아서 밝혀낸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금 교회는 성경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행하고 있는 예배라는 것도 사실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예배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고, 말씀대로 살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께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우리의 예배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예배 역시 지금처럼 순서화되고 의식화 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며 친교였을 뿐입니다. 모여서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와 같이 한다고 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 속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모두가 다 헛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사울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예배로 여러분의 신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하고 좋은 예물을 바치는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청종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여러분을 기뻐하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좋은 예물을 바치는 제사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위해 좋은 소와 양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이러한 행위를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책망합니다.

사울은 우상에게 바치려고 소와 양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모두가 어떤 신을 섬기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좋은 제물을 바친다면 그 의도는 분명 자신의 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점을 치는 이유도 신을 만난다거나 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앞일을 알아서 불행을 피하고 좋은 길을 찾아가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사울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한 속셈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가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사울이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는 책망을 들었다면, 오늘 우리가 행하는 예배 역시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인가를 살피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힘쓰기 보다는, 어쨌든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어보자는 속셈에서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술의 죄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 규례를 제정하신 것은 제사라는 의식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항상 생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존재가 제물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어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 역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아말렉과 같은 정신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이 아말렉을 왜 이토록 미워하시는가를 살피면서 아말렉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자신들에게 있는 아말렉과 같은 삶의 정신이 진멸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은, 단지 의식 하나로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겠다는 속셈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배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지금과 같은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처럼 우리들 생각일 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긋나 있고 말씀에 순종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신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때문에 정작 봐야할 불신앙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를 준비해서 바치고, 교회에서 힘써 봉사하면서 ‘하나님은 이런 나를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불신앙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 내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돕고자 하는 그 마음을 더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것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명목은 신앙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그 내면에는 목사 개인의 욕망이 감춰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원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만들어 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자칫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오해하게 할 수 있고, 결국 사울이 받은 책망을 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함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역시 은석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것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예배 수요일예배 새벽예배, 구역모임, 성경공부 모임, 금요일 기도회 등등의 모임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는 분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보여지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기에 교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낮은 자로 자리할 수 있는 그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님을 아시고 참된 말씀을 알아가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