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삼상 15:24-35 버림받은 사울

우리는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접하지만 T.V나 영화는 가상 세계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죽음을 목격한 것과 다르게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총을 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도 우리는 즐거워하고 통쾌할 뿐이지 죽은 자에 대한 애통함 따위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의 상황이라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볼 때 덤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악한 자의 죽음이든 선한 자의 죽음이든 죽음 그 자체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히 9: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죄가운데 있게 된 인간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인간의 종말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엄숙한 진리입니다. 절대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 세계의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인간의 죽음에 대해, 종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마치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성경을 대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며 나 자신에게 일어날 실제 상황입니다.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한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신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분들을 세우신 것이고,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2년쯤 전에 새벽예배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예배당에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인 사고인데, 그때 사고를 당한 사람이 머리를 치어서 사망하였으며 만약 헬멧을 썼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때는 헬멧을 잘 쓰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사고가 저에게 생생한 경고가 되고 교훈이 되어서 그 후로는 헬멧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생생한 사건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바로 이시간 우리를 경고하고 교훈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즐기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울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악이며 하나님은 악에 대해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울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가볍게 여긴다면 여러분은 결국 사울의 죄와 같은 죄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사울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데 무엇이 여러분에게 경고가 되어서 사울의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울과 같은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묵상하며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15장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림을 받은 순간 사울은 ‘살아있으되 죽은’자가 됩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사울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가를 염두에 두었다면 아말렉의 모든 것은 진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말렉의 것에서 좋은 것이 보였고, 그것을 남겼다는 것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세상은 진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바라볼 때 진멸을 당할 악의 세력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좋은 것이 가득찬 곳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버림받은 사울과 같은 시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생생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할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현실로 존재할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현실로 나타날 이야기를 사울의 통해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에서 사울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여호와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 버림 받았다는 것은 영원한 사망을 의미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의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사울처럼 ‘여호와가 너를 버렸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심정이 될 것 같습니까? 혹시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된다는 두려움보다는 ‘여호와가 나를 버렸다면 내 삶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은 아닙니까?

사울은 여호와가 버렸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범죄 함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범죄 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버림받음을 피해보고자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스스로 범죄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범죄하게 된 이유를 백성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두 원하는 일이었기에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범죄를 말하면서도 범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세움으로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죄는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 정상참작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했구나’라는 애통함보다는 ‘하나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것으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므로 먹었다고 핑계하고,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핑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그 어떤 것이든 바로 내 자신이 범죄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누구를 있게 하든, 무엇이 있게 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이 나를 유익하게 하든 해롭게 하든 상관없이 신자가 할 것은 변함없이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뱀이 꾀인다고 해도 선악과를 먹으면 안되었고 하와가 주었다고 해도 먹으면 안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으로 존재해야 할 책임이 신자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면 ‘누구 때문에’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범죄 하였습니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범죄에서 버림받음을 생각한다면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버림받음을 면해 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범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죄는 버림받을 정도까지는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서 좋은 소와 양은 백성들이 남긴 것이고 자신은 그 백성들이 두려워서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정상참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사울의 재판하는 재판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울은 왕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백성들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보다는 백성들에게 높임 받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사울은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는 부탁을 사무엘에게 합니다. ‘백성들이 원해서 할 수 없이 한 일이니까 그만 용서하고 함께 가서 나의 승리를 위해 여호와께 경배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는 부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것으로 인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부탁을 거절하고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고 가려고 돌이킬 때 사울이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아 찢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27절). 그러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28,29절)는 말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것은 절대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0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에게만 사정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면이고 자신의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들어주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을 버리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사울의 이야기가 어찌 남의 이야기로 그쳐질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 자신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다면, 사울과 같은 모습 자체를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느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였는가 하면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친 후에 사울이 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전쟁 후에 사울이 한 일은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의 결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다면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흔적을 남겨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과시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울에게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저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버리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 곧 사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보여지는 것은 버림받은 사울의 모습뿐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허세가 아닙니다. 겉치레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곧 신앙입니다. 사울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마음에 이미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높이고 왕의 허세만을 부리려는 모습만 보여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신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의 삶이 보여지는 가를 사울을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범죄 함을 백성들 때문으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정당화를 꾀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보다는 자기 체면이 손상되고 무너지는 것을 한탄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안에서 자기 이름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뿐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버리지 못할 때 신앙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신을 높이기 위한 허세와 겉치레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허세일 수 있고, 기도를 하는 것도 허세일 수 있으며, 봉사를 하고 구제를 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한 겉치레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거짓일 수 있으며, 목사에게는 교회가 허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자기 이름을 위한 기념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을 하나님의 은혜며 도우심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교회를 자신을 위한 기념비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배당을 크게 짓고자 하는 것에도 예배당을 자기 이름을 위한 기념비로 삼고자 하는 허세가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허세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둠으로써 잘못된 허세와 겉치레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인데 말씀을 치워버림으로써 결국 허세와 겉치레가 돌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목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서 좋은 소와 양을 남겼다는 사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죄인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죄를 죄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절에 보면 사울을 떠나려고 했던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고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를 합니다. 애당초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을 따라가서 사울이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까? 사울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나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간 이유는 32-33절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남겨 놓은 아각을 죽이기 위해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죽인 것은 단지 아각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증거물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사울의 탐욕의 증거가 바로 아각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각을 죽인 것은 사울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각처럼 사울 네가 하나님께 죽음을 당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각이 사무엘에게 불려 나올 때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살았다’고 하면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아각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역시 아각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한 자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지 못하고, 사망이 없는 것처럼 좋아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변개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조차도 죄에 대한 사망을 보지 못하고 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죄로 인한 심판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지 겉치레 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종말이 어떠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그토록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살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고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로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기를 바랍니다. 피흘리신 주님이 주신 영생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이시간 하나님의 빛 된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춰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어두운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실 때 우리는 자연히 사울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버림받은 사울입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까? 신자에게 귀한 것은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끝으로 시편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