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삼상 16:1-5 하나님의 준비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공의를 시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항변한 선지자가 하박국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핍박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 때문에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굽게 행하고 있다는 항변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현시대의 상황들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고 있음을 믿으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시대의 모습도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핍박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것을 누리며 풍요롭게 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시대의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도 수천 명이 죽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비만과 성인병으로 죽어갑니다. 한쪽에서는 배고프다고 아우성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 살쪘다며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과연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하나님에 대해 의문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현 시대의 상황이 걸림돌이 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면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의문과 답답함은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멈추지 않을 의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받아 들일만큼 그 생각이 높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하심에 대한 해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현 시대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거듭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음도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은 즉각적으로 교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울을 버리시겠다고 하셨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하셨다면 즉각 왕을 교체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도 어린나이에 사울에 의해서 그토록 모진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사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의문은 있습니다. 사울은 분명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바로 사울 말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나이가 어렸다면 왕을 세우는 일을 미루셨다가 청년이 되었을 때 왕이 되게 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움 받은 사울이 버림을 받고 대신 다윗을 선택하고, 그것 때문에 다윗이 사울로 인해서 많은 곤란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 않겠습니까?

분명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편함과 이익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위와 같은 생각들이 타당할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왕위를 교체하지 않은 것 때문에 다윗이 고생했다는 결론이 내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범위에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들의 일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고난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현재의 고난을 극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물론 고난에 대해서 신앙을 단련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답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항상 나 개인과 연관된 고난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고 사무엘을 보내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에도 즉각적인 왕위 교체가 없는 것은 사울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울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의 불신앙과 악함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시대의 악인들도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악인의 번성도 하나님의 일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이 번성하고 세상의 현실이 결코 신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을 때 신자는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이 번성하는 세상 속에 자기 백성을 팽개치듯 그냥 두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로 인해서 슬픔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것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사울이 폐위됨으로서 이스라엘에 닥칠 혼란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슬픔이든 간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슬퍼한다는 것 자체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슬퍼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무라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무엘이 슬퍼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무엘의 슬픔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위한 슬픔이든 이스라엘의 앞날로 인한 슬픔이든 사무엘의 슬픔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무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사울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이새의 집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른 것을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픔이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이삭과 함께 모리아 땅으로 갈 때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절 下)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물음에 대해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합니다. 이때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을 이삭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양을 제물로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인해 고민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짜 제물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전혀 고민도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모를 때 이삭을 바쳐야 한다는 현실은 분명 고민이며 슬픔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의 슬픔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울이 왕으로 버림을 받았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장래도 걱정이 되었을 것이고, 또 설사 사울의 개인에 대해 슬퍼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생각지 않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분명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면 또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울이 버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는 근심이 안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데는 분명한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어둠과 혼란으로 빠져들 때 이미 하나님은 빛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나 사사시대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몰락할 때 이미 사무엘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사도행전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확인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마게도냐로 빌립보로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면서 고난과 고초를 겪었지만 그 모든 것은 루디아를 만나고 옥중의 간수를 만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는 일이 준비된 결과였지 않습니까?

시 119:67절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하고 고린도후서 4:17절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자 개개인에 대해서도 뭔가를 준비해 놓으시고 일을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잠잠하실 수는 있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한 백성으로 굳게 세우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된 것을 준비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했을 때 현재의 상황에 대해 놀라는 것은 베들레헴 성읍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절에 보면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성읍의 장로들이 떨며 사무엘을 영접하면서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장로들이 사무엘의 등장에 떨면서 이러한 물음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등장은 언제나 잘못을 책망하고 지적하는 심판의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사무엘이 온 것은 혹 자신들에게 책망 받을 일이 있어서가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떨면서 ‘평강을 위해서 오십니까’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 성읍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미리 알았다면 사무엘의 등장에 그토록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시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사무엘의 등장은 분명 긴장을 일으키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체험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준비하셨고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에 대해 분명한 답을 들으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오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떤 유익이 준비된 사건인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서 놀랄 수 있고, 슬퍼할 수 있으며, 근심과 염려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현재의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일로 인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고 계신다면 사무엘에게 하신 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과 형편으로 인해서 슬퍼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보지 못한 채 계속 슬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지 않고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 쫓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고 구원을 체험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사울을 즉각 폐위하지 않으시고 계속 왕위에 두심으로써 다윗이 고난을 받은 것에도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준비된 결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 또한 하나님이 준비한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준비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현실이기에 미리 앞일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험에 들기도 하고 저축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고난을 막기 위해 준비하기 위해 힘씀으로써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음을 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세상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 안심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영혼을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음을 잊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우리에게 굳게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준비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음이 사울의 즉각적인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으면서도 수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 세상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잘 살게 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의 것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로 세우기 위해 인생의 어려움과 밑바닥을 경험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내가 준비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위해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에서든 슬퍼할 수만도 염려할 수만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