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삼상 16:6-13 하나님의 기준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크다 할지라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외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외형으로 내적인 면을 판단할 때 분명 잘못된 판단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음을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언제나 누군가를 판단하는 문제에서 수시로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의 내면을 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점은 무엇입니까? 유일한 해결점은 판단자체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판단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저 사람 돈이 많은가 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이 판단을 금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하지 않는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되어지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셔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사무엘로 하여금 시행착오를 하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으로 가서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 내가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라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간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는 일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이미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에 대해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모두 접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미리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모든 아들을 만나야 했고, 또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엘리압을 보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엘리압의 용모였습니다. 7절에서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엘리압은 용모가 빼어나고 키가 컸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런 외모를 보고 왕다운 풍모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사무엘이 용모와 신장을 보고 엘리압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은, 이스라엘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과 같은 시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9: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해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풍모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외쳤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마음에 흡족한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으로 인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외형적인 것은 신앙과 연관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도 같은 판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람을 보는 시각과 기준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외모란 그냥 생김새일 뿐입니다. 뼈에 뒤집어 씌워 놓은 가죽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 가죽의 모양이 사람의 전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엘리압처럼 용모와 신장이 뛰어난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왕이 될 수 있는 용모와 외형적인 조건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기준 자체가 항상 실수와 잘못됨을 유발하게 됨을 가르치고자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서 왕으로서의 조건과 기준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준과 조건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과 조건에 의한 판단을 무너뜨리려는 것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새의 다른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비나답도 아니고 삼마도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일곱 아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물어서 양을 지키는(16:11) 또 다른 아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5절을 보면 사무엘이 자신이 온 목적을 말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이새의 모든 아들을 제사에 참여하도록 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사에 나온 아들은 일곱이었습니다. 한 아들이 제외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된 것입니다. ‘너는 양이나 지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한 택한 왕이 바로 그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뛰어 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명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잘못된 기준과 판단 때문에 하나님은 아니라 하시는 것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는 아니라고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답을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에게 ‘다윗’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새의 집에 보내심으로써 사무엘의 잘못된 판단을 드러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됨과 실수를 드러내심으로써 우리가 무엇에 부족하며 무엇에 대해 잘못된 사람들인가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미리 드러내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본문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판단기준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어린 다윗이니까 어리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다윗을 택하시고 세우신 것은, 외형적인 조건이 왕으로서의 일을 하게 하는 힘과 능력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용모와 신장을 보게 되는 것은, 일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능력이 있을만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외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외모를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은 요구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오히려 하나님께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어린아이 연로한 자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아이는 힘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합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구별하여 세우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볼 때는 틀림없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길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의 선택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선택만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너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음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외형적인 것은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외형적인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돈 있는 부자, 이런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잘나오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라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은 이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 또한 외적인 조건을 따져서 베풀만한 사람에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베푸신 것이 아닙니까? 이미 이러한 구원을 받은 우리가 누군가를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망각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외적인 조건을 잘 갖춘 바리새인들은 책망을 하시고 오히려 조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창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창녀나 죄인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악한 습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외적인 조건을 갖춤으로 교회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모이는 것 자체가 참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무엇을 보고 이웃을 판단하십니까? 이웃의 중심을 보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웃을 보시는 것처럼 보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기껏해야 외적인 조건만 볼 뿐입니다. 형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선택에서 다윗은 제외되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서로 판단치 않아야 하는 모임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판단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판단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속 중심으로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성격이나 성품을 보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보여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속 중심을 보여주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형제를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바라보십니까? 다시 한번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처럼 형제를 보지 않으심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형제에 대한 판단을 금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누가 누구를 판단할 관계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만을 말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