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 삼상 16:14-23 사울과 다윗


윤동주 님의 서시를 보면 그 시작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시 전부를 외지는 못해도 이 대목만큼은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내용을 암송하면서 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사람이 아무리 바르게 살기 위해서 애쓴다고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그럴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잘 지키며 산다면 가능하지도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하늘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의 기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외모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시각입니다. 보이는 것이 외모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속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기준 앞에서 과연 속중심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외모는 얼마든지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행위 완전하여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중심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속중심은 우리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떤 세력에 의해 붙들려 있는 것이 속중심이기에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속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고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향해 부끄러움을 가지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하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 온전히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인지를 잊을 때 그의 행위는 다만 자신을 위한 것으로 치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울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한 사람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에 대해 부끄러운 모습인가를 알지 못했기에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사울이 크게 대조되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과 악신은 뚜렷이 대조되는 관계에 있으며 세상 마지막 때까지 투쟁하고 싸우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사울에게서는 오히려 여호와의 신이 떠나버리시고 악신이 사울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울과 다윗이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립관계는 창세기 3:15절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 관계를 연상케 합니다. 창세기 3: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 관계가 되어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칠 것이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서로 전쟁과 투쟁의 관계 속에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립 관계가 바로 이것을 연상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립 관계는 오늘 본문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합니다. 악신을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신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신의 활동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허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악신의 활동을 허용하시는 것은, 악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신의 활동이 대조되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악신의 활동을 도구로 이용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신으로 인해 사울은 번뇌하게 됩니다. 번뇌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뜻합니다. 고민과 걱정 염려로 인한 정신적 쇠약을 뜻하는 것이 번뇌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번뇌의 이유입니다. 보이는 것만 의지하는 인간으로서 보이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걱정과 고민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신하들은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16절)고 건의를 합니다. 이로 인해서 사울은 수금을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도록 지시하고 결국 다윗이 사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악신으로 인한 번뇌로 인하여 새롭게 왕으로 선택된 다윗이 사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이 떠났습니다.

이 부분은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 치료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음악 치료의 효과는 입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수금을 타는 것을 음악 치료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치료란 단순히 사람의 감정을 조금 다스리는 것일 뿐이지 본문처럼 악신을 이기는 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과 사울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와 악신이 함께 한 자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서로 대조되고 대립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수금을 탐으로써 악신이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악신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인용해서 오늘날 찬송이 마치 악신, 즉 귀신을 쫓아내는 효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야 합니다. 열심히 찬송 부르면 귀신도 도망간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찬송 자체를 능력으로 여기도록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이 수금을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악신이 사울에게서 떠났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악신이 떠나는 일은 오직 다윗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였고 그런 다윗만이 악신에 대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금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신이 떠난 것과 오늘날 찬송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중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다윗을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으로 번뇌하고 있는 사울 앞에 세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너무 복잡하게 일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으면 하루속히 왕을 교체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다윗을 사울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의 악신을 떠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21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든 자를 삼았다고 말합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사울이 왕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다윗이 왕입니다. 이미 기름 부음까지 마친 다윗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 왕인 다윗을 이미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선언을 받고 악신으로 번뇌하는 사울을 섬기도록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을 섬기는 다윗으로 인해서 악신이 떠나는 도움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일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과 사울에게서 예수님과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생각할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없습니까? 악신이 들어 번뇌하며 고통당하는 사울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관계로 세상의 일로 인해서,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번뇌하면서 살아갑니까? 온갖 고통과 걱정과 염려들에 휩싸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형편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음으로 인한 평안함과 복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 앞에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섬기는 분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악신으로부터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악신이 들린 상태는 고통이었습니다. 왕이면 뭐합니까? 악신으로 인해 번뇌하고 고통 받는 삶이라면 왕이라는 것도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 앞에 선 다윗은 비록 목동이었고 어린 소년이었지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사울에게서 악신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과연 누가 더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악신이 들린 상태는 그가 어떤 신분 어떤 존재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코 행복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다윗, 그가 참된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섬김으로써 우리를 악신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지위와 소유 등등을 가지고 존재 가치를 판단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러한 삶에 번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악신을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이시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삶은 비참과 고통이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은 항상 여호와의 신이 떠나지 않는 신자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번뇌를 보면서, 우리 역시 여호와의 신이 떠났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지 못할 때 사울과 같아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51장을 보면 머리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나 나단이 저에게 온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는 악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죄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사울의 상태를 목격했기에 그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비참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돈 없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고 나를 버리셨다는 것이 비참함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버리지 않을만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사울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발견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비참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이 비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에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면 뭐하고, 목사면 뭐합니까? 세상 지위가 아무리 높은들 뭐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는 비참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직까지 세상 것으로 고민하고 번뇌하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인생의 비참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세상 것으로 자기 인생을 꾸며보고 싶은 욕망만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인생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소망해야 합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수단으로 살기를 힘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원하는 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을 버리셨고 여호와의 신은 사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는 모습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교만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참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으로 인해 구출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여전히 우리의 뜻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 스스로 신자라고 자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선택했는데 버리실까?’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자는 선택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즉 ‘선택했으니까 어떻게 살든 버리지 않으시겠지’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떠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선택 자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택하여 그리스도안에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머물기 위해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