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 삼상 17:1-11 골리앗

<본문>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 17:1-11)

<설교>

만약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제하여 버리면 그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믿음을 제하여 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제하여 버리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될까요? 아니면 주일을 지키지 않게 될까요? 그것도 아니면 헌금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게 될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욕할까요? 만약 이러한 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믿음을 제하여 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모습들은 믿음으로 인해 보여 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믿음을 제하여 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이라는 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논리로 모든 것을 생각해 본다면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보여 지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도 할 수 있고, 그 외 다른 반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많은 한국교회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를 외형적인 것에서 찾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기도를 하는 것, 헌금을 하는 것 등등의 외형적이고 행동적인 면을 두고 믿음의 여부를 판가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과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고유 특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외형적인 것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을 오해하게 하는 잘못된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인 것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외형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는 다닐 수 있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도 기도하고 헌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믿음에서만 보여 질 수 있는 고유 특징을 외형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결국 믿음이 아닌 것도 믿음으로 오해되어질 위험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믿음이 아닌 것과 믿음인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분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대 교회는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출발부터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무엇이 믿음인가?’의 답을 인간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열심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이 믿음의 변질을 낳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사업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참된 교회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내면에 악한 사단의 속성이 감추어져 있다면 제아무리 선한 일에 열심이라 할지라도 참된 교회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볼 때는 바르고 참된 교회로 비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교회상이 보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고 판단하실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이러한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보여 지는 특징이 어떤 것이며, 과연 믿음으로 세워지는 참된 교회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를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인 ‘골리앗’이 등장을 합니다. 사람들은 골리앗을 생각할 때 대부분 다윗을 함께 생각합니다. 소년 다윗이 물매돌로 넘어뜨린 블레셋의 장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이스라엘의 믿음 없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역시 골리앗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처럼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골리앗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사울과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임한 사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울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하나님이 신이 떠나고 악신이 임한 사람에게서 보여 지는 것이고, 다윗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반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서 보여 지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 즉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사울을 보면 되고,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알려면 다윗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본문은 골리앗을 등장시켜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골리앗을 대하는 모습 자체가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확연하게 구분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리앗과 더불어 싸우는 다윗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골리앗에 대한 이스라엘과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신자가 믿음이 없이 살 때 어떤 모습이 보여 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 자신들이 믿음에 거하는지 믿음에 거하지 못하는지를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4-7절까지 보면 골리앗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의 키, 그의 무기 등등 모든 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방인의 장수를 이토록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골리앗을 엄청난 힘의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드러내고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은 그 신장이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말하는데 고대 측량법에 한 규빗은 약 45㎝, 한 뼘은 약 13㎝로 계산합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의 키는 283㎝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는데 그 무게가 놋 오천 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11.5g인 것을 계산하면 갑옷의 무게만도 57.5㎏이 됩니다. 그리고 놋단창을 메었는데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 즉 7㎏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방패든 자가 앞서 행하고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은 그 신장이나 무기 등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골리앗 앞에서 사울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기가 죽고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모습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그 속에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더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과 힘의 대결입니다. 군대의 숫자, 무기, 용맹성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군사력으로 드러나게 되고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이 상식을 뒤집어 버립니다. 상대의 군사력이 어떠하든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믿음이 그들의 모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지 이방인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나 조건들이 승리의 요건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기 보다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울은 골리앗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에게 1:1의 대결을 요구합니다. 블레셋은 골리앗이 나설 테니까 이스라엘도 한 사람을 택하여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싸워서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종이 되자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자신의 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자신보다 힘있는 자가 없다고 믿었기에 1:1의 대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사울과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고만 있을 뿐입니다. 골리앗을 이길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나단입니다. 14:6절에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나단은 적어도 사람의 수를 보고 겁을 먹는 나약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장에 보면 암몬 사람이 야베스 사람들을 치러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기브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리 높여 울 때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되어 이스라엘 사람을 모아 암몬을 쳐서 승리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떠난 지금 사울에게는 그러한 용기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힘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 역시 블레셋에 대하여 싸울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상태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전쟁의 승리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게는 자신의 힘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곧 용기이며 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이 임함으로써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보여 지는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떠났다면 그러한 믿음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의 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힘이 나약하다는 것을 보면서 상대의 강한 힘 앞에 기가 죽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버리면 결국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 결과 힘이 있다고 여겨질 때는 골리앗처럼 큰 소리를 치게 되고 힘이 없다고 여겨지면 사울처럼 힘 앞에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자신은 과연 믿음이 있는 자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에 머물러 살아가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분명 힘이고 능력입니다. 내가 힘이 있어지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임을 믿는 그 믿음이 힘이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세상에 대해 절대로 기죽기 않게 되고 항상 당당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골리앗은 항상 외형적인 힘을 앞세워서 싸움을 걸어옵니다. 과연 그러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외형적인 힘 때문에 기죽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골리앗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가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 앞에서 기가 죽는다면 결국 공부 잘하는 자식이 골리앗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교회는 수가 적은데 저 교회는 수가 많다는 것 때문에 기가 죽고 실망하게 된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수가 많은 교회가 골리앗이 아닙니까?

골리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모습으로 이스라엘 앞에 서 있습니다. 키 큰 용사로서, 그리고 단단한 갑옷으로 온 몸을 무장하여 누가 봐도 기가 죽을 만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골리앗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울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 믿음 없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일까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부흥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나도 골리앗 되게 해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서로서로 골리앗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용해서 골리앗이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다스립니다. 이것이 악신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교회에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교인수가 많은 교회의 목사는 적은 교회의 목사를 은연중 무시하게 됩니다.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악신이 임한 자의 속성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악신은 모든 것을 힘으로 대항하게 하고 힘을 내세워 싸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에는 인간의 힘과 노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서든 은혜를 말한다면 그 일로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은혜를 말한다면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심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감사하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믿음에서 골리앗에 대해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리앗을 세워서 사울이나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존재를 내세워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는 믿음이 제일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오직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하나면 구원의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다면 돈이든 권력이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 할 것이 없어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싸움을 걸어오는 것에 대해 똑같은 방법과 똑같은 속성으로 대항하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외형적인 것으로 싸움을 걸어올 때 자신도 외형적인 것으로 대항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처럼 돈과 권력과 숫자로 자신을 무장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걸어오는 싸움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크게 보는 것을 내세워서 신자에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 대해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대항하셨습니다. 결국 돈을 과시하고 세상에 대해 날마다 믿음으로 살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승리의 삶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볼 때 크게 보이는 것, 부럽게 여겨지는 것, 기죽는 것, 모든 것이 골리앗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골리앗을 우리 앞에 세워서 우리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만약 사울과 이스라엘처럼 기죽고 두려움이 떤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떠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앞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이 믿음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처럼 돈을 구한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이 아닌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외형적인 것에 대해 결코 기죽지 마십시오. 세상이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한 심령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는 쓸모없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을 오히려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당당함이 신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