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 삼상 17:17-30 엘리압의 분노

<본문>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더라 다윗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 이스라엘과 블레섹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였더라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삼상 17:17-30)

<설교>

골리앗이 이스라엘 앞에 등장하여 1:1로 맞붙어 싸울 사람을 내보라며 큰소리를 치고 위협을 할 때 이스라엘이 가장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분명 골리앗처럼 힘센 장수였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장수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힘센 장수를 보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달라거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신을 찾는 이유이며 기도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곧 믿음입니다.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해서 전혀 엉뚱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잘못된 생각인가 하면, 사람은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만 기도하게 되는데, 이때 기도의 목적은 오로지 내 문제 해결에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 골리앗이 되기 위해 살아갑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키 크고 힘세고 모든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자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유는 다른 사람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자신의 힘을 비교하기 때문에 그러한 불만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왜 골리앗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인가?’라는 강한 불만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면 기도 내용은 역시 자신을 골리앗처럼 만들어 달라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신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은 골리앗과 같은 존재를 높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높임 받기 위해서 골리앗 되기를 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겠습니까? 똑같이 골리앗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골리앗을 원하는 세상에서, 골리앗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자는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본문은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 전쟁터로 다윗이 오게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안부를 살피고 올 것을 지시합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왔을 때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서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형들을 찾아 문안하고 함께 얘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전혀 잘못됨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잘못되어 있었음을 지적해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을 들은 다윗의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게 된 것입니다. 엘리압은 화를 내며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절)라고 말합니다. 엘리압은 다윗의 말을 듣고 다윗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다윗의 말에 대한 엘리압의 반응입니다. 왜 엘리압이 다윗에 대해 화를 내며 다윗을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소리치는지 그 속마음을 살펴보면서 엘리압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지, 혹 다윗처럼 행동하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이 오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다윗에 대한 엘리압의 반응은 우리가 많이 겪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엘리압처럼 많이 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었던 엘리압과 같은 행동을 찾아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고 고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다윗은 소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새가 전쟁터로 심부름을 보낼 정도라면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들을 따라 전쟁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전쟁에 참여할 만한 나이도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다윗의 나이가 십 사오세 정도가 아니었는가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쟁터에는 나갈 수 없는 어린 나이였음을 생각해 볼 때 엘리압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른들의 일에 어린애가 건방지게 나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한 말은 군대의 힘을 돋아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군대가 왜 이 꼴이냐는 책망을 어린애로부터 들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체면 상하는 일이고 자존심을 구기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윗의 형들도 이스라엘의 군사로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한다면 26절의 다윗의 말은 다윗의 형들까지 포함한 말로 들려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나이가 어리다 해도 힘이 특출한 존재였다면 엘리압도 쉽게 화를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을 대적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왜 할례 없는 골리앗을 두려워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과 힘도 전혀 없는 다윗과 같은 어린애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엘리압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또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많은 일을 할 사람이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신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윗이 한 말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리지만 믿음이 있는 다윗으로서는 당연한 말이고 따라서 엘리압은 다윗의 말을 듣고 믿음 없는 자신을 뉘우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엘리압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엘리압에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몇 마리의 양이나 맡아서 치고 있는 약한 어린애였고 별 볼일 없는 동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동생에게서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할례도 하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족속들이고 당신들은 하나님의 군대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그냥 듣고만 있는가?’라고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형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나 사건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성경이 지저하고 드러내는 우리 자신들의 잘못됨을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읽지 마시고 장차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그 상황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읽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골리앗 이야기만 해도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해 알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골리앗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울이나 이스라엘 군사들이 믿음이 없는 한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이 하나님을 믿고 나가 싸우면 하나님이 도와서 승리하게 할 것인데 왜 두려워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라면 골리앗과 같은 엄청난 존재가 내 앞에서 큰 소리를 칠 때 과연 믿음으로 나가 맞서 싸우고자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결과를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본문을 대한다면 내 자신이 곧 믿음이 없는 사울이고 이스라엘 군사며 다윗에게 화를 내는 엘리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는 것은 힘도 없으면서 큰소리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압의 사고방식이며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믿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볼 때 블레셋 군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압의 상식은 믿음이 아니라 힘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믿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기준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힘이 있어야 큰소리 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말에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힘도 없으면서 너무 건방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보낸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염두에 두기 때문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리다는 것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다윗을 나무랄 뿐,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돈을 사랑하고 돈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는 부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부자 앞에 돈 없는 가나한 사람이 등장하여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할 때 과연 그 부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부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 그렇구나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닌데 내가 너무 돈을 사랑했구나’라며 자신을 뉘우치겠습니까?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참으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도 여러분도 자각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건방지다’ ‘교만하다’ ‘돈도 없는 것이 큰소리만 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보다 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과연 건방지다 교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결국 사람은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한 말과 약한 자가 한 말을 달리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압이며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세상 것으로 힘을 계산합니다. 힘이 있는 그가 곧 강한 자이며 강한 자의 말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강한 자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당시 누구보다 강한 자는 믿음으로 블레셋을 바라보는 다윗이었으며 믿음이 없이 다만 힘을 기준으로 해서 골리앗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있는 사울이나 이스라엘 군사들, 엘리압은 다윗보다 더 연약한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는 자의 믿음의 말이 건방진 것으로 교만하고 완악한 것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려는 발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믿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당신 돈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속셈을 가지고 돈 없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돈 없어도 천국 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오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은 힘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믿음에 세우고 예수님께 두기 위해서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기 위해서 나보다 힘이 없고 못나 보이는 사람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으로는 못나보인다 해도 그가 믿음에 거한다면 그는 누구보다 강한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를 통해서 나의 믿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것 때문에 혹 건방지다 교만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말에 개의치 말기 바랍니다. 다만 혹 믿음을 이용해서 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골리앗이 눈앞에 보이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만 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날마다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신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