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삼상 18:1-9 사랑의 관계

<본문>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1-9)

<설교>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많이 들었고 사용하는 말이기에 잘 아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사랑에 대해 말하려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좋아하는 감정 자체를 두고 사랑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웃이 어렵고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사랑을 이러한 시각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분명 불변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행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고전 12장을 보면 마지막 구절인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대한 경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은사가 더 나은가를 따지면서 경쟁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고전 13:1-3절을 보면 어떤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3절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즉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도와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결국 사랑과 어려운 이웃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도와주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즉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이웃을 도와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고 해서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사랑을 이해함으로써 하늘에서 주어진 참된 사랑에서 멀어진 채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서도 이웃을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사랑은 도덕과 윤리적인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관계에 머물기 보다는 법적인 관계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이 없을 때 등장하는 것은 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적인 관계는 쉽게 말해서 ‘내가 무엇을 안했는데 혹시 내게 벌을 내리지 않을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를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주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이 곧 법적인 관계에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를 따지지를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 우리는 항상 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법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대할 때도 법적인 관계에서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일 분입니다. 항상 ‘나는 하는데 너는 안한다’는 시각으로 형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 자신들이 사랑의 관계에서 형제를 만나기보다는 법적인 관계에서 만나는 것이 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제가 어려울 때 조금 도왔다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우리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먼저 1절의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 구절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당시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났습니다. 혹 다윗이 사울에게 와서 수금을 탈 때 다윗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 있다는 가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을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것은 18:1절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처음 만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만난 사람이 마음이 들 때 호감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감이 가진다고 해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남녀 관계에서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있지만,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역시 처음부터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인간의 감정과 상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늘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사랑은 오늘날 사랑 없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나아가서는 한국교회를 책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언약의 관계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저는 사랑을 언약의 관계에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언약의 주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까지도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얻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믿음까지도 내 공로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믿는 것이 곧 언약의 관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절대로 자기 백성에게 ‘주일을 지켰느냐?’ ‘십일조를 하느냐?’ ‘성경을 많이 읽느냐?’라는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물음을 한다면 그것은 법적인 관계에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법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를 가리켜서 자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법에도 매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를 아는 신자가 진정한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 것처럼 신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옳은 사랑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신자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고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울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윗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7절의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물리친 일을 두고 다윗을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다윗을 높이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요나단처럼 다윗을 생명 같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다윗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한 일이 자신들에게 큰 득이 되었기 때문에 다윗을 좋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에게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해버리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까?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백가지를 잘해주다가도 한가지를 잘못하면 잘해준 백가지는 잊어버리고 잘못한 한가지를 기억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다가 한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원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깨어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에 의한 언약이기에 사랑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조건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약관계이기에 내게 좋으면 사랑하고 나쁘면 싫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의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라는 구절과 5절의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는 구절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귀히 여겼으며 다윗을 매우 좋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울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 대한 사울의 마음이 여인들의 노래 소리 하나에 변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노래에 대해 사울은 아주 불쾌해 했습니다(8절). 그리고 9절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즉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게 여겨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사울과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사랑은 너무 부끄러운 수준에 있습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떠들고 있는 수준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변인데, 우리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고 바뀝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받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에게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도를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준이 아닌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이런 것을 따진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할 마음이 없음을 뜻할 뿐입니다.

20;14-17절을 보면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다 끊어버리실 때라도 인자를 자기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대적은 사울을 말합니다. 결국 요나단은 하나님이 사울의 집을 치실 때 인자를 베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중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왜 다윗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까? 당시 다윗은 도망을 다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인자를 내 집에서 끊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맹세하게 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택한 자임을 요나단이 알았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과 언약의 관계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면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그러한 맹세를 하게 하는 것이고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다윗은 주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생명같이 주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뭘 의미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자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되고 못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인자하심이 나에게서 끊어지면 내 생명도 끊어짐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세상을 다 멸하실찌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을 끊어버리지 않겠다고 언약하신 그 언약에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로 머물러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형제 역시 사랑의 관계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감정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도 주님의 언약 아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친분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야 할 내가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살았음을 아는 믿음으로 만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과의 언약관계를 아는 신자에게서만 보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