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삼상 2:1-10 한나의 찬양

(5강) 삼상 2:1-10 한나의 찬양

세상의 약함과 강함은 소유의 질과 양으로 결정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강한 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히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소유의 많음을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따라서 소유가 적다는 것을 불행하며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을 찾는다면 그 내용이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진정한 신자로서 살아가신다면 분명히 말씀드릴진대 앞서 말씀드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현재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을 낳은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도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은 낳은 것은 단지 없던 아들을 하나 얻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분명 우리가 흔히 하는 평범한 기도는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없던 여인이 아들을 낳았으면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나는 아들을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즉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없던 자신에게 아들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 때문에 사무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겁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 인하여 뿔이 높아짐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뿔이라는 것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힘이 되는 아들을 주셨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심으로써 자신을 높이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이 내용들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한나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과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 대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직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차원의 기도가 거의 모두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본문의 한나의 기도와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한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에게 주어진 것에 있지만 한나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나에게 주어진 것은 한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있게 하는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찬양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잘못됨은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빼앗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확고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빼앗겨 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여기게 되고 하나님보다 더 큰 힘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에게 자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더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이 되는 아들을 주셨다는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되는 아들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와 안주셨다’는 의식에서 발생되는 차별인 것입니다. 이런 차별의식에서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러한 브닌나에 대해서 한나는 1:6절에서 ‘대적’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네가 나를 괴롭히니까 너는 나의 원수다’라는 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본문 1절에서 ‘내 원수들을 향하여’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나는 ‘원수’라는 단수가 아닌 ‘원수들’이라는 복수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브닌나 한 사람에 대해 원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가 지칭하는 원수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곧 브닌나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척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한나의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석’이시라는 말을 합니다. 한나 역시 ‘하나님 같은 반석이 없으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한나에게는 반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사무엘도 한나에게는 반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바로 그분이 아들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나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반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반석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즉 나에게 반석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고 힘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에서의 반석인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가 말하는 반석의 의미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한나의 찬양을 보면 그의 모든 관심과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아들이 없던 자신에게 아들이 주어지고, 그것으로 큰소리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는데도 한나의 관심과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사무엘은 한나의 마음을 더욱 하나님께 붙들어 놓는 기회였던 것이지 한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도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힘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소유의 여부로서 강자와 약자로 차별됩니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괴롭힙니다. 그리고 없는 자는 고통을 당하며 힘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힘을 가지기 위한 목적과 수단으로 작용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의 찬양은 선지자의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8절을 다시 보면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되며 없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있을 때는 있는 것을 자랑하며 자신의 힘으로 내세우고, 없을 때는 없는 것으로 불평하고 낙심하며 살아갑니다. 한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원수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여러분에게 있는 것으로 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교만을 꺾으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에 비해서 없는 분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든지 그들을 부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러분의 소유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소유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굳건한 힘이라는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잉태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없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모두 없는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본래부터 내것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내것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남보다 많이 가진 자신을 뭔가 다른 존재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보다 복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특별히 사랑해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사고방식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없는 분으로 보내셔서 소위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소위 있다고 하는 강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들이 없는 한나가 당한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나의 찬양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6-55절을 보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찬양의 의미가 본문의 한나의 찬양과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시고 무엇을 위해서 오시는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찬양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교만한 말, 오만한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자의 특징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뿐, 있게 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게 하신 하나님이 없게 하실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하고 오만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못산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때문에 있는데서 더 보탬으로써 더욱 힘있는 자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살아가는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9-10절을 보면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고 하십니다.

한나가 말하는 하나님이 힘을 주실 왕은 다윗 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결국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짐을 생각해 볼 때 한나의 찬양은 장차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높이실 것임을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임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세상의 소유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돈 없이는 못산다’는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보니 바로 오늘 우리가 여호와를 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를 말하면서도 돈을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음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진심으로 나의 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 그는 예수님으로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입니다.

오늘 한나의 찬양이 우리들의 찬양이 되어서 세상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세상의 소유는 결코 우리의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시고 전능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없게 하시는 분도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있다는 것 때문에 교만하지 마시고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