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 삼상 18:10-21 미움과 시기

<본문>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삼상 18:10-21)

<설교>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자기 영광을 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만을 높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높아질 때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하고 시기와 미움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기와 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것을 스스로 다스리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시기와 미움은 내 스스로 작정하고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나타나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시기하겠다’고 마음먹고 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의 대상이 내 앞에 등장할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기와 미움이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것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악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스스로 착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가는 나 혼자 있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차를 타고 갈 때 신자들과 함께 동행 할 때와 나 혼자 운전하며 갈 때의 행동이 다를 것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내 속에 있는 포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착함과 신자 됨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서 억눌려 있던 악함들이, 누군가 나를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보여줘야 할 대상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 놓고 자신의 속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결국 착함으로 자신을 위장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악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시기와 미움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악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기와 미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을까요? 분명 시기와 미움을 없애겠다는 것은 허황된 생각일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은 죽어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을 때 시기와 미움 또한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없앨 수 없는 시기와 미움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없앨 수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마음 놓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시기와 미움으로 행동하는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신자로서 시기와 미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계략을 사용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인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이 사울에게서 시기와 미움을 발동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누군가가 자신보다 인기가 높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그를 죽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죽었으면 하는 속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하는 마음이 이미 그를 죽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지금 우리들 속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인기 있음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애를 썼던 사울의 그 모습이 그대로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 얘기는 곧 우리 자신의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10-11절을 보면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악신에 들린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무슨 해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만 봤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행동을 전혀 한 것이 없는데도 사울 스스로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단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미움과 시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미움과 시기를 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미움과 시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서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가지고 내 멋대로 온갖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런 생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고 제 멋대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오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오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겠다는 생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참지 않겠다는 생각, 나만을 위해 주기를 원하는 생각, 이런 것으로 인해서 항상 쓸데없는 오해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참으로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해 참지를 못한 것은 다윗 때문에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소외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만 없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미움과 시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17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는 계략을 세운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은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면 백성들의 반발을 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딸을 준다는 것을 미끼로 전쟁터로 보내어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면 자신이 죽였다는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도 성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악은 최후 순간까지 자신만큼은 지키고 보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울의 모든 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유는 다윗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14절의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게시니라”는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은 여호와가 함께 하고 있는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였으며 죽이려고 애를 쓴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울의 악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은 다윗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윗이라는 소년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여인들이 다윗을 높이며 노래하는 것 역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승리하게 하셨고 다윗을 세우셔서 일하시고 계심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다윗이 나보다 인기가 높다는 것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미움과 시기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역시 부지런히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나보다 낫고 나보다 인기가 있고 나보다 잘한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른 사이에 미움과 시기가 발생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분명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에서 그것을 봤습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승리를 다윗의 것으로 여겼던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사울에게서 시기와 미움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승리에서 하나님을 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셨음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다윗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골리앗을 두려워했던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신자에게서 보여 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함께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사울의 모습만 보인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성령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십시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보기를 부지런히 하십시오. 여러분께 되어진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높아지고 인기가 있고 잘난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만드셨음을 생각하는 것이 성령이 함께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다윗보다 자신이 더 인기가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왜 내가 높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나고 높아져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시기와 미움 속에 사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내가 높아져야 하는가?’

사실 내가 높아지고 내가 잘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벌레보다 더 못난 존재로 살아가도 할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머무른다면 누구에 대해서도 시기와 미움보다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시기와 미움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것은, 다윗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저 사람은 잘되게 하시고 나는 못되게 하시는가?’라는 불평을 가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기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잘되게 하셨다면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되게 하신 것입니다. 못되게 하셨다면 못된 것에서 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잘되든 못되든 우리가 구할 것은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나보다 잘 난 사람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미움의 대표적인 사건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아벨이 가인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가인이 생각할 때 하나님이 자기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벨에 대해 무조건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그 속성이 사울에게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고, 사울의 속성이 우리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까? 죽어 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그런 마음이 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내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영광만을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워서 일하고 계심을 보기 보다는 ‘저 사람이 나보다 잘났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잘났다 못났다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잘났다 못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구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갔을 때도 그 노래가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만 믿음을 볼 뿐입니다. ‘사울은 믿음이 있고 다윗은 믿음이 없다’ 이렇게만 평가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남이 나보다 더 낫다고 해서 분통이 터질 이유도 없는 것이고 속상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시기와 미움은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의 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인기 있는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높일 때 기분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입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칭찬하고 높이고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모습임을 염두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며 산다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악한 내가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날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마땅함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나보다 잘난 사람도 나보다 못난 사람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업신여김이 나오지 않습니다. 시기와 미움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꿈꾸며 항상 하나님 보기를 힘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