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삼상 19:1-7 사울의 맹세

<본문>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삼상 19:1-7)

<설교>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와 그 목적은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새 생활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모든 소망과 의지를 맡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새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열심과 의지로서 일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린 채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일을 언급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일을 도우시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주장하는 세태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긴 하되 하나님의 다스림과 영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있는 신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어렵고 힘든 일에서 단지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믿음은 가시밭길 속에서도 피난처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항상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거하는 신자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모든 상황과 형편이 나를 고초와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의미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뿐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의지하고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 자체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한다면 먼저 ‘나는 나에 대한 신념을 버렸는가?’라는 물음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은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합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은 다윗을 죽이고 싶은 악한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서 발생하는 열매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과 연관된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나게 되면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미움과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람이 나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달라져야 하고 말하는 것 성격까지 달라져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동에 변화가 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의 변화를 가지고 사람이 나아진 것으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행동의 변화를 믿음의 결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술을 먹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서 술을 안먹게 되었습니다. 분명 행동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술을 먹다가 끊은 사람들은 모두 성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자의 달라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행동이 달라졌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라면 그는 결코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리 행동이 세상이 알아주는 착한 사람의 것으로 달라졌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사람이 달라졌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행동은 달라졌지만 자기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시기와 미움은 변함없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의 달라진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다윗을 심히 기뻐하는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나서게 됩니다.

4-5절을 보면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는 말로서 다윗을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극히 잘못된 것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는 구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지금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한 소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한 소년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보다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보다 한 인간의 업적을 보면서 자신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에는 필히 사울과 같은 모습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 역시 같습니다. 배후에서 일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미움과 시기, 업신여김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함께 포함된 말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뛰어난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저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능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6절을 보면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지극히 옳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이것을 믿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7절의 말씀처럼 다윗을 사울에게로 인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요나단이 사울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면 어떻게 다윗을 사울에게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7절은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 얘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면 참으로 우리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즐거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다윗과 화해하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며 즐거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울의 달라짐을 생각하며 우리도 사울처럼 달라지자는 말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다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자 사울이 악신이 들려 또 다시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창으로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8-10절). 과연 이러한 사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맹세할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요나단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기 위해 거짓으로 맹세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맹세까지 한 사울이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사울은 자기 맹세대로 행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아무리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하나 다윗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자 또 다시 시기와 미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의지와 신념으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수시로 마음을 가다듬고 믿음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내가 생각한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러한 내 자신을 생각할 때 ‘달라져야’한다는 말은 참으로 공허한 말에 불과할 뿐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8-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상태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미움을 원하고 시기를 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미움과 시기이며 불만과 불평과 불신앙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미움과 시기를 몰아내자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결심을 해야 합니까?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은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악을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이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는 바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말 그대로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앎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 의해 지배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단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미움이 없고 시기가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달라지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인간의 약함과 자기 실체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달라짐’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신자를 도덕군자로 만들려고 헙니다. 믿음이 있다면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서 ‘성화’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보여져야 할 성화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이것을 찾으신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행함이 신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행함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함에는 위선과 거짓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임을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결심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기보다는 그것이 인간의 악한 본질임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자는 여호와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잃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