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삼상 19:18-24 사울의 예언

<본문>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고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사무엘상 19:18-24)

<설교>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으로 교회 되는 것이며 교회의 힘은 무엇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로서 교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국 종교집단으로서의 교회 모습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필히 교회의 타락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절에 보면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모습은 진리의 기둥과 터로 존재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진리가 증거되고 진리가 세워지는 쪽으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구제를 한다면 구제를 많이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제에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구제라면 그것은 선행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이방인과 교회의 구제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보자면 선행으로서의 구제는 나에게 남은 것으로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구제받은 자로 바라보며 형제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같이 나누는 것이며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선심 쓰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구제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누는 것이 곧 진리가 바탕이 된 구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서의 구제는 ‘구제를 많이 하자’라는 말을 하게 되고, 구제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많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구제를 많이 하기 위해서 교회가 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바탕이 된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어떻게 해야 진리가 증거 되는가?’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쪽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서 신자가 행할 것은 복종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종은 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에게서만 보여 지는 모습일 뿐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들에게서는 복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복종 받을만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직 힘에게만 복종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세상이 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진리에 누가 복종 하겠습니까? 오직 진리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진리를 알아보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인해서 새롭게 세워진 나라인 것입니다. 진리에 복종하는 무리들이 있는 나라,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로 교회되는 것이며 진리가 힘이며 진리를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진리에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진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주인이 되어서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또 다시 악신이 들려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인 미갈의 도움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라마로 도피하여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사울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모두 고하고 사무엘과 함께 나욧으로 가서 거하게 됩니다(18절). 여기서 나욧이란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숙소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20절에 선지자 무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무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위한 숙소를 가리켜서 나욧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울이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말을 듣자 다윗을 잡기 위해 사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을 잡기 위해 온 사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시 사자를 보내자 그들도 예언을 하게 되고 다시 세 번째 사자를 보내자 그들 역시 예언을 하게 됩니다(21절). 그러자 네 번째는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을 찾아가는데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도 임하여 그도 역시 예언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3절).

결국 본문의 내용은 다윗을 잡기 위해 온 모든 사람들이 사무엘이 수령으로 있는 선지자 무리들에게 왔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자신들이 할 일은 잊어버리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한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라마 나욧에 온 목적과 자기들의 일과 연관된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연관된 신령한 말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다윗을 잡으러 온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심지어는 다윗을 그토록 죽이려고 애를 쓰던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일단 우리에게 있을 궁금증은 ‘왜 사울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면 그 사람은 평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초점을 두는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겠다고 뜻을 두시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인간의 자질이 바탕이 되어서 하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을 좇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신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울을 얘기하면서 내 안에 사울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곧 사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된 것은 우리의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붙드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악신이 들렸던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악함도 다스리며 우리를 붙드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은 사울 한 개인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기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보여줘야 할 나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통치를 받기 원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지금 이스라엘은 ‘사울의 나라’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울이라는 사람의 뜻이 중심이 되어 있는 나라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수령이 되어 있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수령이라고 해도 사무엘의 뜻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에 다윗을 잡기 위해 온 사울의 사자와 사울까지 합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초점을 두기 바랍니다. 즉 사울과 사울의 사자가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지배하는 나라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하는 나라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내 말을 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말을 하게 되어 있으며 이들의 무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곧 이러한 모습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면서 좋은 일을 하기 위한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만 제대로 선포되어지면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진리의 기둥과 터로 존재하면 교회로서 부족함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것 하나로 완벽한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진리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진리는 교회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진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다가 돈과 예배당과 사람의 수를 더합니다. 구제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선교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곧 선교하는 것이고 선교를 많이 해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돈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선교를 안하면 교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교회가 교회 구실을 하는 것은 선교를 많이 하고 구제를 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고 돈이 많은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 선포되고 모이는 신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 있을 때 교회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진리에서 멀어집니까? 그것은 진리가 돈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게 해주지 못합니다. 진리가 어려운 사람에게 구제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진리보다는 돈을 힘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힘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진리인 말씀을 힘으로 삼지 않음으로서 교회는 무너지고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말씀이 힘이 되어서 존재해야 하고 말씀만이 나를 지키는 길이요 방법이라는 것을 고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무엇이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진리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은석 교회의 교회됨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예언을 하는 사울의 사자들과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기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미움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자신의 일은 잊어버립니다. 시기와 미움도 잊어버리고 예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욕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그는 자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은석 교회가 과연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은석교회를 통해 보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위태로움은 적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이 적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태로움은 말씀으로부터 관심이 떠나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교회가 눈에 보일 때, 내 교회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할 때, 외적인 것으로 교회의 조건을 갖추고 싶어 할 때, 그것이 곧 교회의 위태로움이고 부패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싸움은 끝까지 말씀에 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만약 은석 교회가 세상적인 외적 조건으로 교회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교회가 아니며 신자도 아닙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편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소출이 없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힘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0-33절)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든 신자든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하늘의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들의 꽃도 하나님이 입히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있는 것이지 세상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데 없다고 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주실 것이고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보호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 환경을 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족한 자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려지는 것이고 이러한 무리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며, 교회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세상 것을 무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교회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의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십자가로 되어지는 것이지 세상에 보여 지는 선행이나 열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즉 구제나 봉사 선교 등등의 활동으로 말씀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은석교회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에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감으로써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말을 외치면서 진리보다는 돈과 교회 부흥을 기둥과 터로 삼고 있는 교회 속에 은석 교회가 서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석 교회가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려지고 그로 인해서 우리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우리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만 말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은석 교회가 보여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보이지 못한다면 은석 교회는 존재 이유를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단지 기독교에 속한 종교 단체로 전락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가 되어지기 위해서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