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 삼상 20:1-16 요나단의 생명

<본문>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 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사무엘상 20:1-16)

<설교>

세상의 인간관계는 가문이나 혈통 출신학교 등등의 여러 가지가 조건이 되어서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성씨, 같은 고향 사람, 심지어는 다른 지방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지역의 차번호를 봐도 반가워합니다. 이처럼 자신과의 어떤 동질성을 매개로 하여 인간관계가 이루어짐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다윗을 잡으러 오자 다윗이 그곳을 피하여 요나단이 있는 곳으로 간 것입니다.

비록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와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했다고는 하나 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왔는지를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 와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이려고 하는지 호소를 한 것입니다. .

다윗의 호소에 대해 요나단은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2절)는 말로써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것에 대해 부인을 합니다.

요나단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호소했고(4-5절)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걸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에(6절)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맹세를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더군다나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마 나욧으로 간 사울의 일을 모른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의 말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아들인 요나단이 슬퍼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일을 숨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위기에 대해 호소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을 미리 알아서 다윗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고 흔히 생각하는 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다윗이 어려울 때 요나단이 돕는 내용을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참된 친구라는 교훈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를 단순히 친구의 우정에 대한 교훈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정에 대한 교훈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요나단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면 사실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해가면서까지 다윗을 돕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눈을 속여 가면서 다윗을 돕는 것은 아버지를 배신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물론 요나단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울의 행위를 막으려고 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면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다윗의 대적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 즉 자신의 집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실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단순히 우정의 차원에서 다윗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정이 좋다한들 친구 앞에서 자신의 가문을 멸망당할 가문으로 얘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단은 자신의 가문을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멸망의 가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가문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윗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깊은 호의를 보이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의 후계자입니다. 즉 사울의 왕위를 물려받을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은 자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다윗으로 인해서 왕위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단도 사울을 도와서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입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왕이라고 하는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요나단에게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은 오직 다윗으로 인해서 주어짐을 알았기에 아버지인 사울을 배신하면서까지 다윗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까? 14-16절을 보면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에게 멸망을 받을 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는 것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돕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요나단은 왜 굳이 다윗과 언약을 맺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집을 멸망시킬 것을 알고 있었다면 요나단이 직접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단이 자신의 집을 멸망의 가문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왜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을 모습으로 보게 된 것입니까? 사실 어린 다윗을 죽이는 것은 다만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로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5절에 보면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다윗을 세우셨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요나단에게 있어서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운 하나님의 택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대적의 모습이며, 따라서 멸망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멸망의 집으로 봤습니다. 때문에 요나단에게 중요한 것은 멸망에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에게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다윗 때문에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구언을 위해 하나님이 세운 택한 사람이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니까 구원받는다는 것만 보십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버리고 말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멸망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멸망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멸망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꿈을 헛된 것으로 돌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 멸망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예수는 단지 내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으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는 잘못된 믿음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집안은 여호와께 끊어짐을 받는다. 죽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는 다윗을 통해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다윗 편에 서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는 요나단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에 있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입니까? 아니면 자식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잘되는 것이 관심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멸망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내가 멸망당하는 순간에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이 성공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멸망을 보지 못함으로써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에 대해서는 별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어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주는 인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멸망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나단은 멸망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너의 집안을 멸망시키겠다’고 특별히 계시를 내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다윗이 누구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이 곧 멸망 받을 모습임을 보는 것입니다. 다윗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멸망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멸망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살아가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임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구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담겨 있는 여호와의 인자가 아니라 세상 것으로 국한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멸망의 존재로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망하신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집니까? 그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것은 그저 종교 하나 갖고 있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고 싶지만 돈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흔들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곧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의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여러분에게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잘 될 수 있다는 엉뚱한 희망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결국 여러분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멸망에서 구하고 살리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자하심 뿐임을 알고, 그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짐을 알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자신의 멸망을 바라볼 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가문의 멸망을 보게 되었을 때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명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베풀어지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을 외면하고 어떻게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마음을 예수님께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요나단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택한 자 다윗을 세워서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은 다윗 중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장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과연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면 무슨 부탁을 하겠습니까? 신자로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마지막 말을 지금 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탁을 지금 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멸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에 대해 깨어있는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