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삼상 20;17-29 요나단의 거짓말


<본문>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내가 과녁을 쏘려 함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 보다 정녕히 부정한가 보다 하였음이더니 이튿날 곧 달의 제 이 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삼상 20:17-29)

<설교>

성경을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창세기에 보면 다말이란 여인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 동침하여서 자식을 잉태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말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상식은 다말을 어떻게 평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의로운 것입니까? 세상이 볼 때 다말은 인간의 윤리가 무너진 타락한 여인일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성경이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와 세상이 말하는 의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다말의 얘기만이 아니라 성경의 얘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말이 유다를 속인 것은 분명합니다.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말의 잉태는 유다의 책임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자신의 며느리라는 것을 모른 상태에서 동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말과 동침한 자가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 38:26)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임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행세한 책임이 다말을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유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창녀로 행세하여 유다와 동침을 한 것임을 유다가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그 어디에도 다말의 행위를 두고 그가 시아버지를 속이는 거짓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악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성경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관이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과 윤리관, 그리고 기존의 상식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내용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사전에는 거짓말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서령대로 하자면 본문의 요나단은 사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지금 요나단은 만약 사울이 진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사울로부터 다윗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가지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것은 월삭에 다윗이 참석을 하지 않았을 때 사울의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월삭에 참석하지 말고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반응을 활을 쏘는 것으로 알려주기로 약정합니다.

요나단의 말대로 다윗은 들에 숨어 있고 월삭이 되어 사울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를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하여 월삭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월삭은 매월 첫날을 가리킵니다. 이때가 되면 상번제와 함께 속죄제를 드려서 한 달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새마음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월삭에 사울이 다윗의 참석 여부를 살핀 것을 보면 아마 월삭의 잔치 자리에는 친척 가족들이 모인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사위인 다윗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첫날 다윗이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던 사울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다윗이 보이지 않자 그 이유를 요나단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28-29절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답을 합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형들이 다윗에게 제사를 드리러 집으로 오라고 하여서 자신에게 가도록 해달라는 간청을 하므로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단의 이 말은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다윗은 지금 베들레헴에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다윗이 요나단에게 그런 부탁을 한 일도 없거니와 베들레헴에서 형들이 그러한 소식을 전한 적도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요나단이 거짓으로 꾸며서 한 말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나단은 아버지인 사울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1:19절에는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편 5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거짓말 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멸망하는 자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단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분명 성경은 요나단의 거짓말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요나단이 선의의 거짓말을 했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다윗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짓말이니까 하나님도 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요나단의 거짓말은 그러한 얘기로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일, 또는 남을 위한 거짓말은 괜찮다는 정당성을 하나 만들어 내게 될 뿐입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어떤 이유, 어떤 목적에 상관없이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답을 내리는 것입니다. 분명 세상의 기준으로 하면 목적은 선하다 할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말도 어쨌든 거짓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저는 오늘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이 뭔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이 뭔가를 바르게 이해를 하면 요나단의 말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답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드리는 말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윤리관과 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상식으로 존재하는 나라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다른 나라,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새로운 나라의 상식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생각이 아닌 성경의 말씀을 토대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각으로 제 말을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요한일서 1:6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요한일서 2:4절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역시 2:22절에서는 거짓말 하는 자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4:20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성경이 무엇을 거짓말로 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구절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지만 그 모두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거짓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거짓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거짓말입니까 참말입니까? 적어도 그 말을 하는 당사자로서는 진심어린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느냐 사랑하느냐를 묻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것을 원하고 세상 것을 위해 살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은 말을 가지고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삶과 말이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은 형제를 미워하는데 미움에서 사랑이 나올 수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30:6절에 보면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거짓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 구절이 말하는 거짓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말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한 바를 말하고, 하나님이 말씀 한 것에 다른 것을 더한다면 그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여러분의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여러분이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 하나 잘한다고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 속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저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망해야 할 부끄러운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 참된 말이 될 것입니다.

결국 거짓은 자신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발생합니다. 반면에 참된 말은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면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거짓된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만한 행위가 나올 수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요나단의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요나단의 말은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죽는다면 그것은 곧 요나단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는 것은 곧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나단은 사랑하는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것입니다. 아비를 배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닥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33절에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도 창을 던지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거짓말한 것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다는 말이 요나단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요나단은 거짓말한 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남을 속이는 것 자체를 용납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일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지요. 십계명의 아홉째 계명에서도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것이므로 결국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에게서 과연 참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거짓이 가득합니다. 악이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참된 것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요나단처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실 되게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