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삼상 20:35-42 사랑의 관계

<본문>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요나단이 그 병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으로 가라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사무엘상 20:35-42)

<설교>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대개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말을 할 뿐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사랑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받았다는 것으로 좋아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에 의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염두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껏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자는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는 단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단지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사람을 좋게 해야 하고 친절을 베풀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할 때 마다 꼭 마음 한구석에는 조그만 염려가 남습니다. 그것은 제 의도와는 전혀 어긋나는 다른 해석을 하는 분이 있지는 않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때 ‘그러면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것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친절 자체가 곧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무슨 행사장의 도우미들도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까? 행사장에 가면 도우미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이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들의 직업의식에서 몸에 배인 친절이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친절 자체를 사랑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는데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친절,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의 수준일 따름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말하는 세상은 인간의 착함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합니다. 친절을 베풀며 남을 돕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고, 이러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하게 산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받은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고 다른 사랑을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신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이 보여 질 때 사랑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0절에 보면 월삭에 있는 식사 자리에 참석해야 할 다윗을 요나단이 빼돌린 것을 안 사울이 분노 하면서 요나단을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이라고까지 욕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끌어 오라는 사울에게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32절)라고 하면서 다윗의 죽이려고 하는 것이 부당한 행위임을 항변 합니다. 이로 인해 사울이 창을 들어 요나단을 치려고까지 하는 것을 보고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기까지 하는 것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과의 혈육이라는 관계까지 벗어나서 다윗을 사랑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위험이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데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장차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애서 끊어버리실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게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언약을 맺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인간적인 요소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관계에서의 친분이 아니라 생명과 언약이 개입된 관계이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 역시 생명과 언약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계획한 대로 행동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18-22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한가지 계획을 세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화살을 차기 위해서 아이를 보내고 요나단이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외칩니다. 이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돌아오지 말고 떠나라는 신호였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활을 쏜 것은 다윗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요나단의 생각을 모른 사람들은 요나단이 다만 활을 쏘며 즐기는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이는 화살을 주우러 갔던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38-39절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니는 아무런지 耖라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화살이 요나단의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 어떤 의미의 화살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사랑이 담긴 화살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화살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다만 들고 달음질을 하는 아이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장차 자신에게 주어질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을 치실 때 함께 멸망당할 사울의 가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다윗은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에 의해서 끊어짐을 당한다는 것을 지금의 현실로 여기고 그에 대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멸망이라는 현실에서 다윗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택한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존재 의미를 모릅니다. 요나단처럼 장차 주어질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의 생명과 언약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과 언약의 관계에서 표출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언약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화살을 들고 달리기만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는 도외시 한 채 다만 십자가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자와 예수님은 생명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망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멸망을 현실로 여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나의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이나 베풀어 주고, 하는 일이나 잘되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다만 서로에게 잘해주면 된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잘해주고(복주고, 일이 잘되게 해주시는 것) 나 역시 예수님에게 잘하면(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사랑이 성립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교회로 모였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모였습니까? 편함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풍조 속에서 그나마 주일 하루 편히 쉬지 않고 교회로 모였다는 것도 잘한 일이지만, 그러나 왜 무엇 때문에 교회로 모이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요나단의 사랑의 의미가 있는 화살을 아무것도 모른 채 들고 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머무를 수도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만 그 의미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다만 세상 죄를 위해 죽은 착한 예수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신의 죄도 모른 채 막연하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만 남발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1-42절을 보면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고 말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 헤어질 때 서로 울면서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리라고 합니다. 친하던 친구와 헤어질 때 ‘잘가라’는 한마디면 될 것인데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신다는 맹세는 왜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맹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지 축복의 말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나와 너 사이에 여호와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을 왜 맹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까지 해야 할 문제이겠습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처음부터 인간의 우정과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멸망에서 다윗을 바라보았고,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릴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다윗이고 하나님이 다윗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인자를 다윗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여호와의 심판과 인자하심이 함께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계실 것이라는 맹세를 하는 것은 자손대대로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관계가 되어 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도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여호와가 계시는 관계가 되어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바로 이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멸망당할 죄인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독생자를 통해 여호와의 인자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 신자가 있다면 신자 역시 여호와의 인자가 베풀어짐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자신의 존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고, 이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신자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복을 원하거나 편함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와 신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죄인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관계이며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제해 버린 채 만나는 관계라면 그것은 세상의 인간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으로 전락될 다름입니다. 아무리 친하게 함께 어울리고 밥먹고 웃고 노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친하게 잘 어울린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관계에는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나게 되면,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낮은 자를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비판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되기 때문에 신자의 관계에서도 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을 여러분의 상식에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베풀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보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신자를 만나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서로가 낮아지는 모습일 것이고,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화살을 들고 그저 뛰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화살에 담겨 있는 요나단의 마음을 알고 달려가는 아이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