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강) 삼상 21-6 거룩한 떡과 다윗

<본문>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사무엘상 21:1-6)

<설교>

지난 시간에 요나단의 거짓말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거짓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말의 거짓말이나,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라합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에게는 거짓말을 하였으나 요나단의 행위는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과 일치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다윗을 구하는 것에서 요나단의 질실함이 증거된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세상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에 대해서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단지 사람에 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양심에 기초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믿음에 대해 진실하게 살기를 힘쓰는 신자라면 어떤 일에서든 남을 속임으로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의한 자면서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거짓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의한 자이기에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되게 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도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과 만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보자 왜 함께 하는 자가 없이 혼자 왔는가 묻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 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2절)는 말로서 아히멜렉의 의심을 풀게 됩니다.

다윗의 이러한 말 역시 없는 사실을 꾸민 것입니다. 즉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거짓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치 거짓말에 대해 묵인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시각을 가지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시기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는 인간끼리의 약속입니다.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말자는 약속이 곧 윤리와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에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와 도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경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윤리와 도덕이 있다면 그 모두는 하나님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신자에게 있어야 할 윤리이며 도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덕군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다윗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 편에 있습니다. 누구든 다윗을 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곧 여호와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사울의 집안이 하나님에 의해 끊어질 것임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거짓말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느냐가 아니라 다윗이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는 거룩한 떡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요구에 대하 아히멜렉은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다고 말합니다(4절). 항용 떡이란 음식용으로 만들어 먹는 일반적인 떡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떡은 음식으로 먹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 안식일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여호와의 성소의 떡상에 진열해 놓는 진설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교체해야 했고 교체한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출 25:30; 35:13; 레 24:8, 9).

제사장은 만약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안했다면 그 떡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들이 부정한 일을 행한 적이 없음을 말하고 제사장은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떡은 제사장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사장은 그 떡을 다윗에게 주는 것이며 다윗은 그 떡을 받는 것입니까? 그리고 과연 이것이 율법을 범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에게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라며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자가 시장할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진설병을 먹은 일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행위가 결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본문의 다윗의 행동이나 아히멜렉이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준 것이 결코 율법에 위반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말씀임을 생각해 보면 본문을 통해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조금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단에서는 주일에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음식을 사먹는 것이 옳으냐 사먹지 않은 것이 옳으냐라는 판단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건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해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조항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을 어기면 율법을 어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한 개의 조항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의 뜻을 알았더면 그리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제사라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자비를 행하는 것이 순종이며 율법을 따라 사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지향하는 것은 자비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소에 진열된 진설병은 모두 열두 개로서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그 진설병이 성소에 배치되고 등불의 비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설병을 매안식일마나 교체하는 것은, 떡이 부패해서 상했기 때문에 바꾼다기보다는 이스라엘에 주어지는 안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안식일마나 새롭게 하라는 뜻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 떡을 거룩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제사장에게만 어떤 특혜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설병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제사장이 시장한 다윗을 위해 그 떡을 제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며 진설병이 내포하는 있는 의미를 따르는 것이지 율법을 범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어떤 조항을 내세워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멸망에 처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법이 적용되지 않음에 대해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서로 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완벽히 드러내기 위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모임인 교회에서 증거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답게 비판과 판단보다는 용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잘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 보인다고 해도 그도 역시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 덕분에 생명을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서로가 잘난 것 없이 모두가 못난 사람으로 보인다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용서며 자비하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법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서로 법적인 관계에서 만난다면 분명 누가 무엇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의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으로 교회라는 관계는 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법적인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라는 관계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용납이 있는 관계입니다. 과연 은석교회가 이러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대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되어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시장한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도록 되어 있는 거룩한 떡을 제공하는 것에서 신자의 바른 관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