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삼상 21:7-22:2 두 세계

<본문>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1:7-22:2)

<설교>

겨울이 있기에 더운 여름날 겨울을 그리워 할 수 있고, 여름이 있기에 추운 겨울이 되면 여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겨울이 없다면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갈 것입니다.

신자에게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있음을 알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악함을 엿볼 때 마다 천국을 그리워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세상은 잠이 있다가 사라지는 시간임을 깨닫는 것이고, 세상의 악함과 어려움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천국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목적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 굳게 서기 위한 것으로 집중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안다고 하면서도 천국이 없는 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신자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천국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다운 삶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신자로서의 정당성을 찾고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스스로 신자라 하기에는 너무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의 정당한 길, 천국을 알고 믿는 자로서의 정당한 길, 그 길에 과연 내 자신이 서 있는 것인지 점검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아 가는 것이야 말로 신자된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길이 어떤 길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이번에는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가드 땅의 사람들은 다윗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그 땅의 왕이라고 일컬으면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추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노래한 것을 언급하며 다윗이 자기들에게 도망온 것에 대해 상당히 꺼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드라는 곳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17:4절에 보면 골리앗을 가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죽인 골리앗이 살던 곳으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8,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던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사실 무엇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이 살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을 쳤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가드로 도망을 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가드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은 원수와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으로 도망을 쳤다는 분명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골리앗의 칼로 부장을 하고 갔다는 것은 그들 앞에서 자신을 더욱 드러내는 것인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골리앗을 죽인 사람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위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수가 있고, 아니면 가드가 골리앗이 살던 곳임을 미처 알지 못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이 가드로 간 이유보다는 가드에서의 일과 다시 가드를 나와서의 일을 비교함으로써 신자로서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 때문에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에 대해 소동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들을 말을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즉 신하들의 소동으로 인해서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어떤 해를 입히지 않을까 두려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지금의 상황을 위기라 단정하고 나름대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취한 방법이 스스로 미치광이로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진짜 미친 자로 여긴 아기스는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14,15절)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친 자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에도 보면 그러한 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원군도 그러한 사람인데 그도 왕족들의 세력다툼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술주정뱅이 등의 행위로 미치광이 행세를 했고 그것으로 다른 왕족들의 의심과 경계를 피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나중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들이 세상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기스 역시 미치광이로 변한 다윗을 보면서 다윗에 대해 무시하게 됩니다. 예전에 골리앗을 죽인 두려운 존재로서의 다윗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대하기도 창피스러운 존재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지 미친 자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각입니다.

아기스는 사람을 외형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극히 통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고의로 미친척하는 다윗의 행위도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담대히 행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힘 앞에서 굴복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다윗의 약한 모습보다는 사람을 외형적으로 판단하고 대하는 세상의 통속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으로 사람을 대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말은 단순히 약자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관계없이 윤리와 도덕도 얼마든지 그것을 말하고 있고, 또 그것이 윤리이고 도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은 강자와 약자라는 기준과 논리 속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있다고 할 때, 윤리와 도덕은 분명 장애인을 무시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에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해 편의시설을 만들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윤리며 도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이 정상적인 입장에서, 즉 강자라는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연약한 입장에 있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서로 돕고 살자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윤리와 도덕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못한 자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신은 강자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 나으니까, 내가 더 강자니까 돕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에는 육신을 조건으로 해서 강자와 약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육신은 썼어질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유나 지위 역시 헛된 것들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조건을 가졌다 해도 결국 사망에 처하고 육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조건으로도 천국은 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도우심이 간절한 죄인의 입장에 서서 보면 결국 모든 인간은 약자일 뿐입니다. 장애인이든 미친 자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약자입니다. 이처럼 약자와 약자로서 만나고 하나님이 서로 다르게 주신 환경과 조건 안에서 약자로서 서로 보충하고 나눔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나누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아기스는 미친 다윗의 모습을 보고 그를 자신 앞에 데려오는 것조차도 화를 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올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미친 자라는 것 때문에 다윗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이러한 통속적인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가졌다 못 가졌다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는 않습니까? 가진 자 앞에서는 왠지 몸이 사려지고 잘보이고 싶어하는데 가지지 못한 자나 나보다 못난 자 앞에 서면 조심함이 사라지고 잘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 그것이 곧 사람을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신자는 아기스의 이러한 기준을 부숴야 합니다. 만약 이 기준을 부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힘과 조건에 지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자조차도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맞추어서 통속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의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굴람 굴로 도망을 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환난과 무시와 천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에게로 온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붸기는 입장입니다. 남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처지가 못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환난을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은 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다윗에게로 모여 봐야 자신들의 신상이 나아질 뾰족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에게로 모였다는 것은, 다윗을 통해 힘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다윗이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 함께 하는 마음의 일치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간 것과 그에게서 쫓겨나서 아굴람 굴로 간 것을 비교하면서 신자가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드와 아굴람 굴의 차이는 가드는 세상의 통속적인 시각과 기준이 존재하는 곳이고 아굴람 굴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천대받고 무시 받는 사람들, 즉 세상의 기준이 다 무너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어떻게 다른가는 시편을 통해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편 56편을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시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고난과 마음에 힘든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편 34편을 보겠습니다. 34편을 보면 역시 설명하기를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난 것은 가드 왕 아기스의 경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에서는 가드 왕이 아기스로 되어 있는데, 시편 34편에서는 설명하기를 아비멜렉이라고 말하는 점에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일인입니다. 다만 사무엘상에서는 아기스란 이름이 그의 본명이 아니라 애굽 왕을 바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블레셋 왕을 나타내는 칭호일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어쨌든 시편에서의 아비멜렉과 본문의 아기스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34편의 내용은 다윗이 아굴람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인데 그 내용은 56편과는 상이하게 다릅니다. 56편은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절박한 내용이었는데 반해 34편은 여호와로 인한 기쁨과 평강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34:8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가드에서 벗어나서 아굴람 굴에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면 과연 아굴람 굴에서의 다윗의 상황이나 형편이 그러한 노래를 할 만큼 좋아졌습니까? 다만 굴에 거하는 처지이고, 여전히 붸기는 입장에 있습니다. 무엇하나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조건과 형편을 모두 벗어 버린 자의 노래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이런 노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가드로 갔습니다. 가드는 세상의 통속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곳 가드는 다윗을 경계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저렇게 힘있는 자가 오면 그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다윗은 스스로 미친 체 함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바로 이렇다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에게 굴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힘있는 자를 경계합니다. 싫어하고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평강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교회가 세상의 이러한 통속적인 기준을 따라간다면 과연 어떤 교회로 전락하겠습니까? 서로 경계하고 경쟁하며, 세상 조건을 보면서 머리를 숙이고 때로는 무시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드입니다. 교회는 이 가드를 부숴야 합니다.

그리고 아굴람 굴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굴람 굴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곳입니다. 사는 환경이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음을 노래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굴람 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노래를 할 수 있는 다윗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다윗에게 무엇이 있기에 그러한 노래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그것은 아굴람 굴에 찾아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다윗을 찾아온 것은 다윗에게서 세상의 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다윗의 환난과 고난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평강이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굴람 굴의 모임은 세상의 기준이 부서진 모임이었습니다. 모든 자가 다같이 약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철저히 낮아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서 본 것은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아니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서로 이러한 마음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모여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은 다 무너지고 다만 함께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서 서로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위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환난이나 마음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 일로 마음에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모든 힘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그리스도의 도움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환난당한 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자 할 때 그것이 곧 환난 당한 자의 마음이고 마음에 고통이 있는 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이는 것이 아굴람 굴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굴람 굴이기보다는 가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커지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내 교회를 과시하고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난 사람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은석교회는 아굴람 굴로 굳게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은 다 무너지고 오직 하늘의 기준만이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향한 그 마음만을 귀하게 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교회는 얼마든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천국을 마음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아굴람 굴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