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삼상 22:3-10 도엑의 말

<본문>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사무엘상 22:3-10)

<설교>

여러분은 자신이 언어에 자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겉으로 생각하면 언어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북한처럼 말 한마디를 해도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보다는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며 말을 한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반대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코 언어의 자유를 누리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라 할지라도 상황과 형편에 의해 하지 못하고 감추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아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 회사원의 퇴직 연령이 평균 35세라고 합니다. 회사원은 날마다 퇴직의 위기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 직장에서 감히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할말 못할 말을 가리게 되는 것이고, 때로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을 기준 좋게 해주는 말,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가 말에 있어서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셈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는 과연 말에 있어서 어떤 태도와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본문을 배경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둘람 굴을 떠나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의 도움을 받으며 부모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있는 곳을 떠나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를 향해 길을 떠나게 되고 이 소식을 사울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일행이 유다 가까이 오도록 자신에게 전혀 보고하지 않은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누구에게 복종하고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가를 잘 판단하라는 뜻으로 7,8절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말을 듣고 도엑이란 사람이 등장하여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왔을 때 아히멜렉이 다윗을 선대하고 골리앗의 칼을 준 사실을 발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도엑은 다윗과도 아히멜렉과도 원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불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그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까지 했다는 말을 더함으로써 아히멜렉에 대한 사울의 분노를 더욱 크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엑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살핌으로써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원칙에서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엑이 다윗과 아히멜렉에 대한 말을 사울에게 하는 것은, 사울이 말한 대로 밭과 포도원, 천부장과 백부장이라는 지위가 사울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이기 때문에 사울에게 잘 보이는 것이 곧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 편이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바로 이러한 원칙 아래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다만 힘을 바라볼 뿐이고, 누가 나에게 득이 되는가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없는 말까지 가장하여 아첨을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역시 아는 자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권력과 힘 위에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섬기는 가는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자 앞에서 어떤 말을 하는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4-37절을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로 인해서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남을 욕하는 말을 하고, 시기하는 말을 하는 말 자체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은 속에 있는 것의 표현이고 드러남이기 때문에 말을 가지고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도엑의 경우를 보면 도엑이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다윗과 아히멜렉이 만난 것을 고자질 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엑의 말은 도엑의 속마음이 어떤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물이었습니다. 즉 도엑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울을 보고 있고, 모든 것이 사울로부터 주어짐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도엑의 악함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믿고 의지하는 그 속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말은 속에 있는 것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말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겉만 번지르하고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선한 말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말이 거칠고 화는 내는 말이라고 해서 악한 말로 여기는 것도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말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는 말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담고 있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서의 말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 말은 악하고 헛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내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가가 이웃을 만나서 말하는 것에 고스란히 담겨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듯이 내 속에 악이 감춰져 있었다면 내 말에 악이 담겨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이 담겨 있다면 역시 말에서 그러한 것이 담겨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에서 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인척 했던 위선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실체를 발견하고 진심으로 벌거벗은 부끄러운 몸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너무 많이 속고 있습니다. 위선되고 가식적인 행동으로 둘려 쌓여 있고, 도덕과 윤리로 포장된 행동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인 것으로 오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신앙인으로 오해를 해버릴 때 주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점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의 옷을 입고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도엑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살피고, 그리고 우리의 말에 담겨 있었던 악을 발견하여 주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자의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 보고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눈치 안보고 세상에서 어떤 대접과 취급을 받아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만 보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의 흔적은 말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갈 1: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단호한 말입니까?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말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고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말,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서 저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내 편인가를 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좋게하는 말을 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이것이 말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여 세상을 좋게 하고 힘을 가진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난척하고 싶은 악함이 있고, 이기고 싶은 악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악함들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 드러남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말에서 악함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바로 나 자신의 말에서 악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서 내가 곧 도엑임을 발견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목표입니다. 말을 조심해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내 속에 있는 것은 순식간에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도엑임을 발견하고 나의 악함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을 찾는 것이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은혜로 인해서 나와지는 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말은 한번 쏟아 놓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해야 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신의 말에서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사람인지 하나님인지를 분명히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아갈 길을 다시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 다시금 제 자신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나의 말이 무엇을 위해서 하는 말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서 도엑이 되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저를 살리시는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사람을 좋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말을 전하는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도엑이 된다면 여러분은 듣기에 좋은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함께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속마음에 하나님이 자리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함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말은 듣는 자나 말하는 자 모두 거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석교회에서 전해지고 나눠지는 말에는 사람의 욕심보다는, 힘에 굴복하는 모습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담겨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 믿음의 모양이 여러분의 말에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