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강) 삼상 22:11-19 제사장의 죽음

<본문>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사무엘상 22:11-19)

<설교>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참으로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각기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으로 일하십니다. 때문에 생각이 일치되지 않은 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에 맞는 자기 하나님을 새롭게 만들어 섬기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에게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악한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만 봐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들입니다.

당장 오늘 본문만 봐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 아히멜렉을 포함해서 85명의 제사장이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고만 계십니다. 더군다나 제사장들의 죽음에는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갓 선지자의 말도 개입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유다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사울이 다윗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도엑도 아히멜렉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일의 발단은 다윗이 유다 땅 가까이 간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죽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 제사장들이 죽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대적자가 아니라 오히려 도와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을 도와줬다면 위험에 빠진 제사장을 살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을 한명도 아니고 85명이란 수를 그냥 죽도록 방치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고, 제사장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동조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원칙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복의 의미가 세상 것을 채워주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칙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잘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역시 자기 백성을 잘되는 쪽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원칙은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은 나를 믿는다면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이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귀도 마음도 다 닫아 버리고 성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다른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실패란 곧 낮아짐이며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노력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누구도 이런 상식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종교도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한 삶 자체가 곧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성공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이 행복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을 위한 종교로 남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곧 행복과 연결됩니다. 성공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실패란 불행일 뿐입니다.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피하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사람이며 이러한 기대를 기독교가 알기에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면서 행복을 함께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말하면서 행복을 끼워 파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과연 오늘 본문의 하나님과 맞다고 생각합니까?

분명 제사장들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도운 것이 원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서서라도 제사장들을 구해주고 제사장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심판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원칙과 상식에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계시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물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벨이 가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 아벨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제사 드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 때문에 아벨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아벨을 지켜주셨으면 될 일을 왜 그냥 죽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태복음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헤롯이 아기 예수를 붙들지 못한 것 때문에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지시를 합니다. 결국 이 사내아이들도 예수님으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현몽하면서 길을 지시하시는 하나님이 아기 예수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침묵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다윗 때문에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벨은 하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사내아이들은 아기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이런 일들이 말해주는 것은 세상에서 죽는 것 자체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뒤로 밀쳐 버리고 지금 급한 것은 세상에서 살아남고 잘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삶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성공을 원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눈높이는 실패해도 괜찮은 눈높이로 낮추는 것이 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과연 성공한 인생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삶과 예수님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나의 것,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갈라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우리의 삶을 생각한다면 성공을 원하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허무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성공을 보장하지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과 죽으심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십자가에 우리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세상에서는 죽는 것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곧 해방이며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는 것 자체를 불행으로 여기며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남들은 다 잘되는데 나는 왜 이것 밖에 안되는지 억울할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도 잘되는데 열심히 믿은 자신은 왜 안되는지 억울할 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의 일을 위해 존재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히멜렉은 사울의 말에 대해 당당하게 답합니다. 13절을 보면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 아히멜렉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것이 없나이다”(14,15절)고 말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도와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히멜렉과 그의 제사장들을 죽임으로써 힘을 드러내며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제사장들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사울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애매하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죽음으로 세상의 악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우리의 법칙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법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으로 성공자라는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자는 당당해 질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많고 적음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면서 자신을 불행하게 보게 될 뿐입니다.

신자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세상은 그 사람이 권력이 있는가 재물이 있는가를 보고 판단하고 대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이 아무런 힘이 못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의 악이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만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세상의 원칙에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하든 여러분은 하늘에서 큰 자입니다. 세상이 안알아준다고 해서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악의 나라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신자를 알아볼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힘을 추구한 사람은 힘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때문에 다윗이 칭송을 받자 그것을 다윗의 힘으로 보게 된 것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힘의 체계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힘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자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힘있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예수님이 결코 힘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고 자연히 예수님보다는 세상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죽음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매한 죽음도 억울한 죽음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법칙을 가지고 사십니까? 신자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어떤 일에서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