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삼상 2:12-17 불량자

세상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세상은 절대로 우리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익된 쪽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되어지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은 다 다쳐도 나는 안다쳐야 하고,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안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이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한나는 세상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리는 것도 주리지 않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천국 가는 것도 지옥 가는 것도, 낮아지는 것도 높아지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도 소용없으니까 되는 대로 살아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스스로 부자 되기 위해서, 또는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한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 사람을 기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 것도 아니고, 사기치고 도둑질을 하면서 잘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당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웃의 자녀보다는 내 자녀가 더 잘되기를 바라고, 옆의 교회보다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더 크게 되기를 바라는 이런 마음들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보다 다른 교회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말한 한나의 찬양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에 굳건히 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여러분이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한 자로 산다면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가난한 자로 살아도 그 중심에는 역시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난함은 단순히 못먹고 못입고 사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요함도 세상의 좋은 것을 마음껏 누리는 풍요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삶과 환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되고 부요하게 산다고 해서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내가 잘나고 특별해서 부요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못나서 가난하게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신자의 본분을 잊고 살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신자의 본분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마치 엘리의 아들들이 목사의 아들이면서 교회도 다니지 않고 나쁜 짓만 일삼는 그러한 불량자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자녀가 어쨌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잘 다닌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가 교회를 잘 다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른 목적과 이유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학생이든 청년이든 어른들이든 각기 나름대로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또는 기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없는 마음으로 열심히 교회를 출입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 열심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믿음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의 아들들을 불량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절에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두고 불량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지 못한 이들의 행위는 13-16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3-14절의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는 내용을 보면 먼저 이들은 세 살 갈고리를 사용해서 고기를 삶는 솥을 휘저어 무엇이든지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가져간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에서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부분과 먹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7:31-36절을 보면 가슴 부분과 우편 뒷다리 부분만이 제사장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갈고리를 휘저어서 어떤 부위든 걸려 나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채 자기들하고 싶은 대로 한 것입니다.

또 15-16절을 보면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제물의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으며 이것을 어긴 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레 7:22-25). 이것은 희생 제물의 일부인 기름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나님만이 거룩한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속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기름을 태우기 전에 고기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자신들이 먹을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경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어떠했고 어떠한 죄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이것이 큰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는 것이 오늘날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즉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제사를 멸시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열심히 나온다고 해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자식 교육을 잘 시키자는 교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서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겠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엘리의 아들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의 불량스러운 행위에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불량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율법적으로 하면 제사장직을 이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장이라는 직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라는 직을 이스라엘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특별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한 채 일반 사람은 전혀 손댈 수 없는 제물을 그것도 갈고리에 걸려나오는 것을 무조건 자신들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그만큼 자기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누리고 싶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름을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 고기를 날 것으로 요구함으로써 제사장 가문인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결코 특별계층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제사장을 특별한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기업이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것도 자신들이 벌어서 그 소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것에서 하나님이 허락한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희생의 삶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존재가 유지되는 것임을 배우라는 의도로 제사장을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르쳐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를 생각지 아니하고 제사장이란 직책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때 결국 제사장이라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게 되고, 특별계층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지도급으로 여기면서 결국 힘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타락은 언제나 제사장 계층이 자신들의 역할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때 일어났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잘못된 사고방식은 권력과 힘이 있을 때 그것을 특권층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힘이 주어질 때 도대체 그것들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주어진 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횡포를 일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여진다는 것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에게 세상적인 힘이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로 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신자의 본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신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이나 지위 등을 이용해서 횡포를 일삼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량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본성이 주어진 직책과 지위를 이용해서 타인의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의 아들들의 죄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일 뿐이지 결코 교회에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목사나 장로라는 직책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특권층임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죽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로 죽는가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으로 보지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잊고 살 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엘리의 아들들과 같은 불량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것을 누리며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목사, 장로, 평신도의 구별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평신도보다 하나님께 더 많이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맡은 역할이 그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기죽을 이유가 없으며 항상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누리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한이나 권력을 누리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대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희생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은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불량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지키심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이 불량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