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 삼상 22:20-23 나의 연고로라

<본문>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2:20-23)

<설교>

사람이 신을 찾고 신을 믿고자 하는 이유는 신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한 이유가 강합니다. 일단 신이라 하면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을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에서 행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신에게 있다고 여기고, 자신에게 닥칠 불행조차도 미리 막아줄 힘이 있는 능력자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잘 믿으면 신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려울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불행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털어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나머지는 다 우상이니까 다른 종교와 함께 취급하지 말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추구하는 바가 아예다르며 신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신 덕분에 자기 인생이 편해지고 불행이 변하여 행복이 되는 것을 꿈꾸지만 기독교는 예수님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받고 죽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신의 도움을 받아서 내 자존심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죽이는 길로 가는 것이 곧 기독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는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며 그분의 영광 앞에서 내 영광은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덕분에, 하나님 덕분에 내가 잘되고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기독교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독교의 이러한 본질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히벨렉이 다윗을 도왔다고 사울에게 고발함으로써 아히멜렉의 집안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분명 애매한 죽음이고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을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들이 죽는 일은 없었지 않겠습니까? 결국 다윗이 아히멜렉을 찾아온 일이 그들 집안에 있어서는 멸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때문에 애매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히멜렉의 집안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바로 기독교를 종교로 전락시키는 생각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당연한 그 생각이야 말로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에서 생각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자기 중심이 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과연 그 중심에 누가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인간이며 나 자신입니까? 사실 죽기를 싫어하고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나 자신이 살아있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나의 고집이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생각을 이끌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이 신의 자리를 점령한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 85명의 죽음은 우리의 상식과 당연함을 부숴 버립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인간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곧 부패한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에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부패한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잘못된 상식이 부숴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된 진리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에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 한 사람이 구사일생하여 다윗에게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고하게 됩니다. 그말을 듣고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말하기를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22-23절)고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아히멜렉에게 있을 때 사울의 목자장인 도엑이 거기 있는 것을 발견했고, 또 도엑이 그 사실을 사울에게 고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엑이 사울에게 고하면 아히멜렉이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인데 아히멜렉에게 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도대체 다윗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다윗은 제사장들 죽은 것이 나의 연고라고 말합니다.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라 능히 예상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히멜렉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기존의 상식과 당연함이 살아있기 때문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 자체를 불행으로 보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 있는 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성경을 생각하시면 본문 같은 내용도 능히 이해가 되어질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는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으로 인한 제사장들의 죽음은 사람을 잘못 사귄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알았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미워하는 다윗을 도와주고 다윗 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사울에게는 적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히멜렉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미워하는 다윗 편에 있다는 것으로 이미 죽어야 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그대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길로 들어섰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윗을 미워한 사울이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도 미워하여 죽이는 일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두려워 말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모든 가문이 죽임을 당하는 일에서 아비아달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나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의 다윗의 처지는 자신의 앞길도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울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그러한 다윗이 무엇을 믿고 아비아달에게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책임지실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자신과 함께 하면 아비아달의 생명은 자기와 함께 보전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윗의 생명을 찾는 자는 다윗의 대적입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자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사는 길은 힘이 약한 다윗을 떠나 강자인 사울편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 편에 서는 것이 당장은 사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결국은 멸망을 받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보전은 다윗과 함께 함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내가 사는 길을 쫓아갑니다. 세상의 힘이 나의 생명을 보전할 것으로 여기고, 힘에 굴복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삽니다. 그러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무런 가치가 없이 보여지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식이 여전히 세상의 논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잠시 사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고 영원히 사는 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는 힘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은 고난입니다. 내가 원한대로 살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가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길을 멈추거나 돌아서거나 다른 길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다윗의 연고로 제사장 85명이 죽은 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 보전하도록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보전되도록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하는 말은 예수님이 여러분께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여러 일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에게로 도망을 칩니다. 혹 예수님에게 도망을 치면 혹 예수님이 날 도와서 어려움에서 건져 주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살아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너의 그 일이 나의 연고로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원하는데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하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하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지 마음에 전혀 차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울에 의해서 모든 제사장이 죽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이 아비아달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다윗에게로 도망하겠습니까 아니면 힘을 가진 사울에게로 가서 용서해 달라고 굴복하겠습니까? 다윗에게 도망한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도망친 아비아달에게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보전되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에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다시 여러분의 속마음에 굳게 세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