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 삼상 23:1-14 나의 피난처는

<본문>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14)

<설교>

여러분은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드라마를 보면(주로 사극의 경우에 많음) 어떤 일을 꾀하고 그 일을 추진할 때 자신들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쫓아내고자 계획을 세우는데 그가 쫓겨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 또는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까? 사실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모두 자기 주관적이고 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의 일이 잘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고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경쟁적 관계에 있을 때 그 사람보다 나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으로 형성될 때 어김없이 하나님은 저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러한 생각에 큰 모순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 주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내편이었다가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편이 되어버리는 극히 믿을 수 없는 신으로 전락되어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평생토록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가도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내편이었다가 내편이 아닌 그런 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나 일을 두고 하나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거나 나를 도우신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상태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의 편도 아니고 다른 교회의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회의 편이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지만 그것 역시 여러분 편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 자기 피난처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만들고 자신의 한 몸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 일이 잘될 때 하나님이 돕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잘되다가 다시 잘못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한 일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 다윗에게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이 그일라를 칩니다. 그일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후에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입니다(수 15:44). 그리고 이곳은 당시 다윗이 몸을 피하고 있던 헤렛 수풀에서 약 9키로 정도 떨어져 있었던 지역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2절)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이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대 어떻게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칠 수 있겠는가(3절)라며 반대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에 다윗은 여호와께 다시 묻게 되고 여호와는 블레셋을 네 손에 붙일 것이라(4절)는 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쳐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다윗의 일은 분명 잘 풀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돕고 계시고 그 결과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는 다윗이 강대국이 블레셋을 쳐서 승리하는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들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하나님은 다윗 편에 계시고 다윗을 도우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후에 등장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것을 사울이 알게 됩니다. 그때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다’(7절)는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나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 다윗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라고 말합니다.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이라는 것은 그일라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임을 말해줍니다. 즉 그일라를 포위하면 다윗은 도망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독 안에 갇힌 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이런 상황이 된 것을 보고 하나님이 다윗을 자신에게 붙이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이고 자기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무지한 인간의 자기 착각인 것입니다.

사울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일라를 포위하려고 하자 다윗이 그것을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하나님께 묻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10,11절)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이 내려 올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는 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그일라에서 빠져나와 도망을 치게 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돕고 계시고 분명 다윗 편에 계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이번 일로 인해 다윗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과 싸우라고 하셨는데, 결국 다시 그일라에서 도망을 치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에게 남은 유익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일라까지 가서 괜히 블레셋과 싸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이왕 다윗으로 하여금 그일라를 구원하게 하셨으면 하나님이 다윗을 도와서 사울이 그일라를 치지 못하도록 하심으로써 다윗을 편히 지내도록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일라에서 도망치는 상황이 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일라에 침공한 블레셋을 치려고 하나님께 물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일라를 돕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나중에 다윗이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라고 물은 것에서 다윗은 그일라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고자 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일라를 구해주면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고 자신의 편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일라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그일라를 포위한다고 할 때 그일라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다윗을 붙들어서 사울에게 내줄 것임을 말씀하자 그곳에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얘기는 그일라를 자기 피난처로 삼고자 했던 다윗에게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일라에서 일이 잘되게 하셨다가 결국 도망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는 말을 무수히 하고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다윗은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시 14:6)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59:16)라고 하고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이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62:6.7)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이 피할 곳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 자기 피난처를 만들고자 하는 다윗에게 오히려 피난처를 없게 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까? 결국 다윗이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에는 자신이 피할 곳이 없으며 또 피할 곳도 아님을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떠나서 하는 고백입니다. 즉 육신은 고달프고 쫓기고 쉴만한 곳이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심으로 그 영혼이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세상에 우리의 피난처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이해를 해버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 편이고 나를 도우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피난처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대한 분명한 불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일이 잘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다윗의 일이 잘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분명히 함께 하셨음에도 다윗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은 것은 다윗을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함께 하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여전히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내 피난처를 마련하고자 하는 탐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내 영혼을 도우신다는 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말하지 말고 영육 간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영육 간에 도우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우상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때문에 내 육신을 잘되게 도우시는 하나님이 진짜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다른 하나님을 좇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일라가 다윗을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도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블레셋에서 구출 받은 그일라가 자신을 구원한 것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이었음을 바라보았다면 사울의 침공에도 다윗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다윗에 대한 고마움만 있었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자 다윗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피난처가 되겠습니까?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방식을 얼마든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출애굽 시키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하늘만을 소망하는 것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세상을 피난처로 삼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그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든든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