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 삼상 23:15-18 참된 교제

<본문>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상23:15-18)

<설교>

현대 교회는 친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친교에 의해서 교회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친교가 활발하게 잘 이루어지는 교회는 뭔가 교회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소위 냉랭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교에 큰 비중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교의 명목으로 교회는 많은 행사들을 벌이기도 합니다. 체육대회나 야외 예배, 또는 여행 등이 교인들 간에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친교는 신자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즉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신자가 서로 교제하는 친교는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교제가 없는 교회는 사실 교회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에는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즉 신자들이 서로 한 자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하는 것을 친교의 전부로 여기는 것이 오해인 것입니다. 흔히 ‘친교 식사’ 친교 시간‘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의 대부분은 단순한 사교적인 우정으로 전락한 말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면, 현대 교회는 교회의 친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석교회도 예배를 마친 후 식사하는 시간을 가지고, 또 함께 어울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가지고 은석교회는 친교가 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친교는 교회가 아니라도 세상의 모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서로 마음에 맞으면 어울리고 친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의 친교로 말하기에는 심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서로를 알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일체감을 갖기 위해서는 그런 시간도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별이나 연령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교적인 모임에서 신자들은 행복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즐거움을 고의로 단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사교적인 모임으로 인한 즐거움과 행복을 교회로서의 친교의 전부로 여기는 것만큼은 잘못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사교적인 모임은 친교에 있어서 극히 작은 한가지 표현이고 모습일 뿐, 그것 자체가 친교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친교는 좀 더 깊고 다른 차원에서 경험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참된 교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예와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겪는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형제에게 위로가 되어지고 힘이 되어질 때, 그것이야 말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만 존재하는 교제, 즉 친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참된 친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그일라를 침략한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곳에 거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다윗이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사람을 사울에게 붙일 것인가와 사울이 내려오겠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다윗의 사람을 사울에게 붙인다고 하시고 또 사울이 내려올 것이라고 답합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은 그일라를 떠나 십 황무지 산골에 유하게 되고 사울은 매일 다윗을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하고 있을 때, 요나단이 십 황무지로 다윗을 찾아온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6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계속 쫓기는 형편에 있습니다. 계속 되는 쫓기는 삶으로 인해 다윗은 피곤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역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요나단이 찾아와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교입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는 이러한 다윗과 요나단의 친교를 깊이 묵상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 역시 이들의 친교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어떻게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도왔을까요? 17절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는 말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은 단지 좋은 말로 위로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비록 사울이 부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핍박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적인 사울을 분명 심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바로 그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 꾸며댄 말도 아니고 속에도 없는 위선적인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네 다음이 된다’는 말 역시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셨기에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다윗만 아니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든지 그러한 쪽으로 생각이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미움과 분노와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미 상대방을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만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설사 다윗이 없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일하셨을 것이 아님을 안다면 ‘다윗만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은 전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말에 의해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요나단의 말이 있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계속되는 쫓김과 열약한 상황,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 낙심이 되고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요나단의 말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이 보여주는 신자의 교제인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이들은 다시 언약하고 다윗은 계속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후에 이들은 서로 만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그들의 교제는 끊어진 것입니까? 신자의 교제를 만남과 사교적인 모임, 사귐에 그 의미를 둔다면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는 끊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교제를 그리스도안에서의 교통으로 본다면 이들의 교제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서로 일치되어 있고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몸은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교제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제는 바로 이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인 것입니다.

이들의 교제는 돈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음식을 나누고 돈을 나눈다고 해서 그것으로 형제로 하여금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돈을 나누면서 마음이 상할 수 있고, 음식을 나누다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친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귀한 믿음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는 18장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와 사울에게 섰을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고, 다윗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일 뿐입니다. 즉 신분상으로 본다면 다윗을 친구로 삼아도 요나단에게는 전혀 득이 될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과 어떻게 마음이 연락될 수 있습니까? 마음이 연락된다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마음을 서로 통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봤습니다. 그러기에 다윗과 마음이 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중심에도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셨음을 뜻합니다. 다윗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만약 요나단이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면 이들의 교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교제와 사귐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되었기에 마음의 교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은혜를 벗어나서 인간의 친목도모와 사귐은 모두 참된 교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교회는 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교인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하고 사귐을 통해서 교회를 굳건히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단지 자신의 교회를 인간의 단합과 일치를 통해 굳게 하려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현대교회는 친목과 사귐을 통해 교인들에게 교회의 즐거움과 행복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교회에 오면 다른 교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사람을 끌어당기고 붙들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친목도모와 사귐을 통해 교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할 때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친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과 교제는 지체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돕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 있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교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본질의 믿음에 함께 거하고 같은 거룩함을 추구하며 같은 소망으로 서로 짐을 나눠지고 그리스도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제의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체를 대하지 않는 내가 곧 교제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며 교회를 허무는 악한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만 마음을 두고자 하는데, 정작 나는 그리스보다는 세상에 마음에 둘 때 마음의 연락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을 탐하는 내가 성도의 교제를 방해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교제와 친목은 다릅니다. 물론 친목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이 서로 연락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친목에 열중하고 그것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삼는다면 결코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도움은 내가 믿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형편과 고통을 받는 형제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해줄 때 그 형제는 자신의 힘든 형편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굳게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서로가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한 소망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관계에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교제가 없는 교회는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제는 참된 교제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교제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제는 참된 교회의 본질에서만 나타나는 신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석교회는 그리스도를 행한 마음이 일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모아져야 합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 나라를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에 굳건히 서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일치된 마음으로 모일 때 우리는 이미 서로 마음이 교통하는 관계에 있으며 참된 교제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지 않고, 함께 담소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교제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 하는 자리를 소홀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함께 할 때 서로 얘기할 수 있고, 서로 얘기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낙심하고 나약한 지체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은석교회는 이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어울리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에서의 기쁨과 즐거움만을 생각하지 마시고, 함께 한분 그리스도를 믿고 한 소망과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관계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고 만나시면, 누군가를 시기할 이유도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 것도 은혜임을 안다면 누군가가 나보다 낫다고 해서 그를 시기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요나단이 다윗에게 나는 네 다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분명 단순한 우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어질 때는 우정도 깨어지는 것이 인간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임을 굳게 믿는다면 요나단과 같은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한 소망으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들의 모임인 은석교회에서 그 흔적이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