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강) 삼상 23:19-29 셀라 하마느곳

<본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삼상 23:19-29)

<본문>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현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은 이론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확실한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운 말씀 그대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능한 자임을 능히 자각할 수 있기에, 그리고 신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은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말씀이 지시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무능력한 자들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도와달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당연한 본문인 신앙의 길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순간도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삶의 중심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있게 되면 구하는 것부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어려운 문제들, 나의 편안함, 장래 문제, 이처럼 세상에서 안주하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요구하는 기도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되어짐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감히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존재성을 알기에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질서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이것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을 피조물이라 부르고, 피조물이기에 나를 만드신 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며 원칙인 것입니다. 이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며, 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일하시고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삶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어떤 삶과 상황에서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에게 다시 위기가 닥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준 다윗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 때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피신하여 십 황무지로 갑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을 도와줬으니 다윗이 위기에 처할 때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한대 오히려 자신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을 배신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을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에게 또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에 피신해 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19-20절의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는 말씀을 보면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이 다윗을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사울이 쫓는 다윗이 자기들 땅에 거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을 사울에게 넘김으로써 사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들이 다윗을 왕의 손에 붙이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아부의 정도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힘과 권력에 대한 세상의 자세인 것입니다.

당시 다윗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지만 택함 받음으로서 주어진 혜택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차례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고난의 삶만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을 가까이 한들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권력을 가진 사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자세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에 대한 시각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신자 되게 하셨다고 하지만 택함 받고 신자된 유익이 무엇입니까? 물론 말로는 천국을 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혹 세상의 유익을 더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별 쓸모도 없는 신앙에 대해 우리조차도 무관심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대통령이나 장관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매우 잘 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원합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쓸모 있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는 오직 그리스도로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였는데 왜 계속 고난 속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까? 단순히 사울에게 쫓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게 하면서 세상의 쓴맛을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다윗을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음을 스스로 겪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친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 대개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결국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가까운 사람으로 인한 고통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하나님은 등을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십 사람과 사울과 다윗을 잡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자세히 탐지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에워싸고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킵니다.

27절을 보면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거의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자가 사울에게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 온 것을 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쫓는 것을 그치고 서둘러 블레셋을 치기 위해 돌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을 잡고자 했던 인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사울은 다윗을 잡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건짐을 받을 자로,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은 자로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갔으므로 그곳을 셀라 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고 말합니다. 셀라 하마느곳은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분리했다는 것입니까? 바로 다윗과 사울을 분리한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건짐 받을 자와 하나님이 치시는 자로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다윗을 자기 손에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은 사울을 도우시고 다윗을 버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됨과 못됨의 기준을 환경과 소유라고 하는 세상의 시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시각으로 볼 때 아무리 잘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멸망 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코 잘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잘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신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환경과 소유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 끝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를 현재의 환경과 소유와 형편을 떠나서 성공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시고 붙드셔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보면 고난 밖에 없습니다. 애매하게 쫓김을 당하며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피난처시고 의지할 분임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더욱 더 고난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위기의 순간에 벗어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악인은 뚜렷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건짐 받을 것이고 악인은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승리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현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학원에 모여서 하나님께 신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구 삼아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밀어 넣으시고 하나님만이 피난처임을 배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배신을 당하는 일을 겪게 하시면서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붙드시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어려움들은 결국 나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됨을 믿기에 낙심보다는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이미 세상에서 건짐 받은 자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승리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